헬창과 섭의 흰양말
운동하기위해 헬스장에 가보면 거의 모든 회원들이 장목 흰양말을 신고있다. 특히나 나이키 브랜드가 90프로 이상 차지하는데 왜 헬스하는 남자들은 흰양말을 고집할까? 여자회원이 흰양말을 신은것을 본적은 거의 없는것을 보면 남자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특징인것같은데 ᆢ 궁금증이 생긴다.
SM에서 성향에는 다양한 페티쉬를 가지고있다. 그중 풋페티쉬는 발냄새,스타킹,흰양말,하이힐로 대표된다. 냄새를 제외한 풋페티쉬의 대부분은 착용하는 물건에 집착하는 경우인데 풋페티쉬는 여자보단 남자가 압도적이다. 바닐라,성향자 구분없이 발이 주는 성적 흥분요소는 성기 버금간다. 헬스의 고정룩과 같은 흰양말과 섭성향자에게 신기는 흰양말의 공통적인 현상은 무엇일까? 유독 SM의 섭이나 헬스인에게는 검정색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과도 같은 생각이 따로 풋페티쉬가 없는 나조차도 가지게 된데는 너무나 압도적인 흰양말성애자들이 많아서 인데 따로 호기심을갖는이가 없었는지 관련글을 찾기 어려웠다.
헬창과 섭의 공통요소는 몸이 보여진다이다.
근육이 생기고 발달하고하는 헬스의 과정은 본인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경우조차 남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다. 근육이 키워질수록 짧아지는 트레이닝복장들은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싶어 안달난 행동이다. 섭의 플레이의 대부분은 돔에게 자신의 노예기질을 얼마나 더 보여주는가에 흥분한다. 몸에 새겨지는 채찍과 결박의 흔적들, 실제 플레이는 복종자체보단 가학에 흥분하는 자신의 노예기질을 보여주고 돔이 흥분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헬창과 섭둘 모두 가르치는 트레이너와 주인앞에 순종한다.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트레이너의 카운팅에 죽을동살동 기구를 당기고 들어올리는 헬창과 주인의 가학 플레이에 몸을 맡기는 섭은 닮았다. 나도 혼자서 개인운동할때와 트레이너랑 교육할때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섭성향자역시 주인과 온플보단 오프에서 더 긴장함은 말할것없다. 주인이 있어 노예기질이 생기는것이 아닌 노예기질이 있어 주인을 찾는것과 굳이 운동을 오래해도 개인 트레이너를 필요로 하는것은 마음가짐 이나 자신을 컨트롤 해줄 상대가 필요한것 때문이다.
흰색은 나약함, 순결, 쉽게 더럽혀지고, 백기 투항과 같은 이미지가 있다. 강한것은 유약함을 가지고 있다. 강한 근육을 가진 헬창이 고운목소리와 아기자기한 취미를 가진경우를 종종본다. 섭들중에 우람한 근육섭이 유약한 스탠의 주인을 찾는것도 일맥 상통한다. 자신이 가지지못한것을 가진 상대에게서 느끼는 끌림과 우람한체격과 어울리지않는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느끼는 헬창이 흰색을 선호하는것이 이상하지않은것이다. 섭이 주인에게 무장해제하고 당신만 섬기겠다는 순결주의,백기투항,그리곤 주인에게 의존하는 한없이 나약함을 상징하는 흰색의 이미지는 근육을키우고 중량을 갱신하고 자신을 가꾸는 헬창이 오히려 타인을 의식하고 보여지는 자기애가 강한것이 비슷한것이다.
개들은 다양한 종류에도 공통적인 유전적 특징들이 있는데 그중 가슴과 발에 흰색 모질이 나타나는것이 일반적 개의 형질이다. 이것은 논문으로도 제법 다루어진 주제인데 전체가 온전히 검은 개조차도 가슴과 발에는 흰색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우린 그걸 흰양말이란 애칭으로 부른다. 흔히 섭을 강아지라고 지칭하는데 섭을 신기는 흰양말은 개의 모습을닮게 한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섭으로 하여금 개의자세를 취하게하고 꼬리를 끼운상태에서 흰양말은 마지막 화룡정점이다. 완벽한 개로서 주인에게 다뤄지는 한없이 복종심으로 가득찬 이미지는 바로 흰색이 주는 이미지이다.
다소간 억지나 부분적인 통찰일수있으나 관련주제의 글이 없는 한계로 나만의 해석을 달아보았는데 더 다양한 의견이나 해석이 있다면 듣고싶다.
돌파구는 없다
날책임져줄 주인을 모시고 그에게 복종하며 플레이를 견뎌내고 사는삶은 행복할까?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는 섭이 있어 돈도 갖다받치고몸도 언제든 쓸수있으며 자신의 명령에 한번의 왜?도없이 묵묵히 수행하는 디엣을 맺은 섭이 있는 주인은 행복할까? 공짜는 없다. 자신이 거느리고 요구한만큼 책임에서 자유로운자는 양아치지 주인이 아니다. 그러니 그자신또한 그무게에 짓눌려 살아야하는데 행복일수 없다.
난 가끔 내가 너무나 현실주의자인가? 돌아본다. 성향자의 디엣이 주는 환상에서 벗어날때쯤이면 애써 외면해온 현실이 무섭게 자리를잡고 있다. 하루하루 가스비,전기세를 걱정해야 하는 삶과 나의 의지는 전혀 필요없는 노예의삶에도 돈은 필요하기에 현실의 나는 생활의삶을 살아야한다. 어느주인이 당신을 걷어먹이고 살아 주는가? 있다면 보고싶다. 주인역시 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현실의 삶에 노예인데 섭을 걷어 먹일수 있다는 착각은 하지말아야 한다. 가끔 온전한 복종의 삶이 성향자의 행복이라고 글을 쓰는것에 미혹 당해 그러한삶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의 돌파구가 되어주진못한다. 성향은 당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일뿐이다. 내가 늘 말한대로 올바른 디엣의 성과는 성향과 생활이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걸 의미한다.
뭐든 책임질것같이 환상을 이야기하는 디엣의 허구는 이미 다 알고있는 현실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별 못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이다. 성향자라 하여 반드시 늘언제나 주인이 있는삶이나 노예가 있는 삶이 행복한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사람은 언제나 관계속에 사는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주는 피곤은 때때로 혼자의 시간을 원한다. 관계란건 주인과 노예의 포지션에도 피곤하다. 결국은 상대의 눈높이와 나의 눈높이가 다르기때문이다. 24시간 디엣을 포기하라. 성향은 나의 전부가아니라 조각이다.
디엣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돔이나 섭에게 난 늘 이야기한다. 결국 자신의 성향적문제는 자신이 풀어가지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줄수 있는것이 아니라고ᆢ 당신의 성향을 만족시켜주는 주인을 만났는가? 그또한 당신이만든 환상에 적합했던것일뿐 곧 익숙해질것이고 지쳐갈것이다. 성향은 디엣으로 완성되는것이 아니라 거쳐갈뿐이기에 당신의 가슴을 뛰게하는 화려한 글은 환타지이다.
깨진 그릇은 버릴수밖에 없다.
(디엣종료를 생각하거나 떠났다가 다시 만남을 생각하거나
너무 마음에 든 돔과섭끼리 이별뒤 미련을 못버린다면 내가 너무 사랑했던 연디섭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픈 마음을 돌려세운 것을 생각해보시길 ᆢ 두사람의 마음은 두사람만이 알고 아픔은 아픔대로 가슴한켠 담아 두길 바라며 연디서브에게 해준말입니다)
아이가 다시 돌아왔다.
디엣종료를 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던 아이는 성향이 갈구하는 욕구를 이겨내지못하고 다시금 언저리를 헤맨다. 하지만 어차피 회전하는 목마처럼 돌아옴과 떠나감은 정해진 수순이고 오래된 성향자나 갓입문한 성향자나 예외는 없다. 한번깨진 그릇은 다시 새그릇이 될수없다.
다시 받아들인들 오래갈수없다. 이미 서로가 헤어짐의 아픔을 경험해버렸기에 ᆢ 한번 무너진 신뢰는 원상복구는 불가능하다.
파양은 끝이다. 뒤돌아보지마라. 아쉬움은 다음선택의 신중함을 줄것이고 미련은 욕심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