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

항상 러쉬 매장에 가면

직원분들의 적극적인 판촉 때문에

INFP인 나로서는 혼이 쏙 빠지고 만다.

그날도 마스크팩을 사 볼까, 하고

무심코 매장에 들어갔다가

아가씨인지 청년인지 모를 탈색 사람이 다가와서

온갖 것을 다 설명해 주셨는데,

결국 예정에도 없던 프레쉬클렌저?

무슨 미역 줄거리 같은 지점토 클렌저인데

그걸 물에 녹이면 아몬드밀크가 되고

그 물로 씻으면 피부에 좋다는데..... 

아무리 써 봐도 뭔가 세수를 안 한 느낌?

워낙 뽀독뽀독하게 씻는 데 익숙해서 그런지

촉촉함이 찝찝함 같기도 하고...... 이게 맞나?

예전에 미국 슈퍼에서도 무슨 클렌저 샀는데

도무지 거품이 안 나서 뭐지? 했는데,

원래 그렇게 박박 씻는 건 아시아 문화라고?

아무튼 오랜만에 촉촉한 세안을 해 보았다는 얘기.

하와이에서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

둘째 날, 해변을 순례하는 날이었는데

마지막 일정이 샥스코브였다.

암초가 많아서 파도가 잔잔한 해변인데,

주로 해수욕보다는 수경을 쓰고 물고기들 관찰하는 그런 곳이다.

(물론 서퍼도 있고, 해수욕도 할 수 있지만;)

해가 저물어 가고,

더는 놀 기력이 없던 터라 근처 마트에서

과일이랑 커피랑 비치타올을 새로 사서는

그냥 마땅해 보이는 풀밭에 누웠다.

야자수가 하늘에서 춤을 추고,

석양은 아슬아슬하고

야생 닭들이 여행객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애타게 콩고물을 바라는 그런 풍경.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자니

슬슬 잠이 밀려들고

결국 애인은 코를 골며 뻗어 버렸다.

나도 새로 산 아이폰으로 하늘을 촬영하며

2022년이면 달에서 살 줄 알았는데

폰카 기술만 비약적으로 발달했구나, 라고

쓸데없이 감탄과 한탄을 하던 사이

돌연 어떤 히스패닉 건장남이 우리 곁에 와서

숨을 헐떡이며 눕는 게 아니겠는가?

이 넓은 들판에, 왜 굳이 우리 옆에?

미모에 반해서 접근했다간 큰 호통을 들을 것이야,

지경으로 괜스레, 이보세요, 번지수 잘못 찾으셨어요!

라고 생각하던 찰나,

불현듯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애인에게 타월을 빌려 달라느니, 아니면 옷을 벗어 달라느니

해괴한 요구를 해 왔다.

애인은 영어가 유창한 죄로 그 모든 개소리에 대꾸해 주다가

엉겁결에 입고 있던 민소매를 벗어 주고 말았다.

무척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근처 주차장으로 향하기에,

그냥 남들 눈치가 보여서 그랬나?

차에서 자기 옷을 가져오려고 저러나 싶었다.

물론, 그가 고리타분한 유교적 사고방식을 가졌을 리 만무했지만

한국인의 사고방식대로 현재 상황을 해석해 보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주차장에서 서성이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고작 2만 원 남짓한 가격의 민소매였지만

어쨌든 눈뜬 채로 코가 베였다는 사실에 분개할 새도 없이

저 멀리서 어떤 아시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방금 여기로 건장한 히스패닉 남자가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자기가 바닷가에 있는 사이에

그가 지갑, 차키, 핸드폰 등 모든 것을 훔쳐 갔다고 노발대발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리도 하얀 민소매를 뜯겼다고 말하니,

그 피해자가 너도 당했으니 나랑 같이 그놈을 잡으러 가자고 야단이었다.

또 한 번 영어가 유창한 덕에, 사리분별할 겨를도 없이

애인은 그 정체불명의 도둑을 잡고자 낯선 아시안과 함께 뛰어가야만 했다.

결국 다른 해변에 당도해 보니 그 도둑은 민소매를 버리고

다른 뭔가를 뒤집어쓴 채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사실 나는 그 와중에도

그동안 그알과 궁금한이야기와이 등으로 단련해 온,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불신에 의거해서

혹시 저 아시안도 히스패닉 남성과 한패인 도둑놈이 아닐까?

그 잠깐 사이에 온갖 시나리오를 작성해 봤다.

물론 그런 까닭에 우리 짐을 지킨 건 아니었고,

단지 지치고 귀찮아서 마냥 앉아 있었지만

공연히 정의의 사도가 되어 나까지 달려 나갔다면

지갑과 핸드폰과 여권과 라이카 등등 모든 것을 잃지 않았을지.

아무튼 한가로운 야생 닭들을 보며,

하와이는 참 안전하고 다정한 곳이야... 라고 멋대로 생각하던 순간에

때마침 미친 도둑놈이 홀로 블록버스터 찍고 있는 광경을 맞닥뜨리게 됐으니,

어쩐지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 카페에 가방을 두고 다녀도 문제없는 한국이 최고야, 라고

엉뚱한 결론만 얻었다.

그러고는 저 멀리서 큰 화재가 일어났는지

소방차와 구급차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와이에서의 첫 일정은, 아무래도 초현실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