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리소설 금지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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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 < 금지된 외출 >
세상에 맙소사!
예전에 죽은 여자의 그것도 무참히
살해된 여자의 미완성의 시가 완성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아니한가.
'저 눈물의 날에!'
이건 어김없이 3년 전에 죽은 여류시인
채경림(蔡景林)의 미완의 시 제목이다.
그런데 이렇듯 활자화되다니 어떻게 된
걸까?
채경림이 살아 있다는 걸까?
그럴 리는 없다.
말하자면 시체 검안(檢案)이라는 법적인
절차를 밟아 유족에게 인계된 처지가
아니던가. 가을 국화에 듬뿍 파묻힌 그녀의
장례식은 화려하기조차 했다고 들었다.
아무튼 여류시인 채경림은 역사 밖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시는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녀의 미완의 시를 어느 누가
완성했다는 걸까?
아니다.
그녀의 이미지, 그녀의 테크닉, 그녀의
언어를 정밀하게 모방할 수는 있겠으나,
그녀에게서만이 유별나게 느낄 수 있었던
비극적으로 타오르던 영혼의 불꽃의
소리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환시(幻視) 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시는 '자유 문학'의 10월호에 실렸는데,
'초추(初秋)의 여류시인들!'이라는 특집
제목이 붙어 있었다.
시인의 이름은 윤신혜(尹信惠)!
나로서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나는 '자유 문학'의 여성 편집장을
찾았다. 그녀의 이름은 현수정(玄水晶).
여자로서는 어느 사이 조락의 계절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가볍게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는 사이였고, 농담 한 마디쯤 던지는
사이였다.
"현 여사, 뭣 좀 물어 봅시다. '저
눈물의 날에'라는 시 말이오......."
"그 시 마음에 드세요?"
"그 시더러 별루라니......."
"지나치게 어둡고 지나치게 감각적이오."
"웬 트집이실까. 세련된 언어에, 청신한
표현에, 독특한 기법에, 나무랄 데라고는
없어요. 불안에 짓눌린 한 영혼의 고뇌의
소리가 잘 나타나 있지 않아요?"
현 여사, 그녀로서는 드물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비록 천편일률적이며
상투적인 찬사의 낱말들이기는 했지만.
"허구 누가 추천했는데......."
"그래, 그게 누구요?"
"윤동진(尹東眞) 씨예요."
"윤동진이?"
"네에. 그 양반이 추천했고, 그 양반이
손수 갖고 왔어요."
"그랬었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윤동진과 채경림을 잇는 인연의 사슬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근데 백 선생,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러시죠? 이 시를 쓴 여자, 혹시 옛날에
사랑했던 여자 아녜요? 그래서 상처라도
입은......."
"사랑은 무슨......."
"왜 이래요? 내가 거기의 바람기를
아는데두요."
"실은 말예요......."
"자, 어서 나한테 실토해 봐요."
나는 현 여사에게 채경림의 그 짧았던
삶과 사랑, 그리고 그 비참했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니, 그럼 이 여잔 죽었단 말예요?"
말이오."
"그럼, 이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묻고 있는 게 아녜요."
"혹시 누군가가, 윤동진 씨라도
완성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아요."
"이 시는 말이오, 현 여사, 채경림의
손에 의해 완성된 것이오. 그 여자의
퍼스낼리티만이 강하게 드러나 있단
말이오. 시인마다 추구하는 나름대로의
편집적인 궤적이라는 게 있지 않소. 더구나
이 낱말들의 섬세한 결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어요."
"근데, 그 여잔 죽었다면서요?"
"그렇다니까......."
"이거 나 원 매듭을 풀 수 없는 실뭉치를
매만지고 있는 기분이네."
"우린 그 매듭을 풀어야 해요."
"우리가 아니라 백 선생이겠지요."
하긴 그렇다.
근데 어떻게 매듭을 풀어야 할까?
아무튼 이 시를 완성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가 누구일까?
윤동진일까?
나의 이성은 채경림이 완성했노라고
일깨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채경림은 살아 있다는 걸까?
채경림이 살해되었을 때 누구나 대뜸
그녀의 남편 윤동진을 의심했었다. 경찰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결백을 앞장서서 입증한
내가 윤동진을 의심한 것은 그의 살의를
알기 때문이었고, 그의 결백을 증언한 것은
그의 현장부재(現場不在)를 알기
때문이었다.
채경림은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길게
뉘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쪽
어깨 끈이 흘러내린 탓으로 하얀 젖가슴이
드러나 보였는데, 언뜻 보아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액살(縊殺)이었어요."
그 당시 초동수사에 참여했던
배철수(裵哲洙)라는 이름의 형사가
기름기라고는 없는 목소리로 일러
주었었다.
"액살이 뭡니까?"
나는 그 생소한 법의학적 어휘가 잘
"액살이란 그 뭐예요. 손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얘기예요."
배 형사의 여전히 억양이라고는 없는
해설이었다. 그는 길거리에 나서면
어디에서나 부딪히는 삶에 지친 중년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배 형사의 말로는 채경림의 가냘픈
목에도 무참하게도 액흔이 드러나 있었다고
했다. 코와 입을 압박한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비명을 지르려고 한
것 같다고 했다.
채경림의 마지막 시도가, 필사적으로
절규하며 허위적거렸을 시도가 헤아려져서
나는 몸을 떨었다.
"암튼 면식범의 짓으로 봐야겠어요."
배 형사가 제법 살인 전문가답게 그의
"어떻게 그냥 면식범의 짓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불끈 치미는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의 느릿한
수사활동에 얼마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참이었다.
"여자가 슬립 차림으로 남자를 맞았어요.
게다가 아무 두려움도 없이 등을
보였구요."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닙니까. 어디
단순한 면식범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알아듣겠습니까.
이건 말씀예요, 그 여자의 남편의
짓이에요. 바로 윤동진의 짓이라구요."
그건 이젠 차라리 아우성이었다.
윤동진은 나와는 대학 동창으로 그도
시인이었다. 그리고 극작가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가,
"자네 한번 내 동생과 사귀어 보지
않으려나?"
할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이기도
했었다. 그의 여동생은 마침 미국 유학길에
올라 있어 만나보지도 못했었다. 미국의
이화대학이라는 스미스 대학엔가 다니는
재원이라고 했었다.
윤동진은 이미 중견 시인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나도 한때는 시인 지망생이었으나
예술적인 소양도 부족했고, 정열의 심지도
집이 부유해서 등이 따스하고 배가 부른
탓인가 보았다.
나는 그나마 잡지사나 하나 차려
운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가 채경림을 알게 된 것은 페닌슐라
호텔의 볼 룸에서 열린 무슨 문학상
시상식장에서였다.
우연이라고 보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나지막하니 신음
소리마저 흘렸었다. 하도 눈이 부셔서다.
그녀가 걸친 니나리찌의 보라색 원피스가
그렇게 화려하게 드러나 보일 수가 없었다.
10월의 보라색!
가을 분위기를 돋우는 색깔이었다.
보라색은 그 강하고 신비로운 색채로
눈에 칠한 아이섀도우도 화사한
보라색이었고, 그녀가 손에 낀 반지도
보라색의 스타 사파이어였다.
그녀는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곳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불빛 속에 부각된 그녀의 옆
얼굴은 절묘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대뜸 나의 숙명적인
여인을 찾았다는 생각마저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동반자가 있었다.
바로 윤동진이었다.
윤동진!
30대 중반의 그는 자신을 제법 멋쟁이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걸친 다크 블루의
슈트는 그를 한결 젊어 보이게 했다.
나무랄 데라고는 없어 보였으나,
수염이라고는 없는 사내라는 점이 싫었다.
"여보게, 백형, 우리 집 사람일세."
윤동진이 채경림을 나한테 소개했다.
나는 한순간 현란하게 채색된 무지개꿈이
포말처럼 스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은 돈 많은 나의 대학
동창이고......
백형섭(白亨燮)이라고...... 내가 언제
당신한테 말했었지."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채경림의 현기증 나는 눈길에
시선을 정하지 못한 채 인사했다.
"아, 네에......."
채경림은 애매하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그뿐이었다. 아니 일순 업신여기는 듯한
내가 그날 채경림한테서 느낀 것은
서슬이었다. 그것도 지독한 서슬이었다.
뿔테 안경 속의 외까풀 눈은 서늘하기만
했고, 상큼하게 곧은 콧날이며, 싸늘한
선을 새긴 입매하며, 그 어느 한구석에도
차가움이 서리지 않은 곳이라고는 없었다.
이 여자의 혈관에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일까?
나는 공연히 흠을 잡으려 했다. 간절히
소망하던 고가의 미술품이 남의 손에라도
넘어갔을 때처럼.
그러나 손에 닿을 수도 넣을 수도 없을
때 느끼는 허망함과 안타까움은 몇 배
간절한 것이었다.
그날 채경림은 시상식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석고로 빚은 조상(彫像)처럼
표정없이 서 있었다. 아니 짜증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딘가 신경의 흔들림마저
나타내 보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조차 어떻게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한
흔들림으로 보였고, 그것을 억제하느라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민감한 관찰력이 없더라도 그들 부부가
냉전상태에 있다는 것을 금세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들 부부는 누가 보아도 이미
타인이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증오가 잉태되어
있었다. 아니 적의마저 배태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아니 희열마저 느꼈다.
왔음이 밝혀진 것은 뒷날의 이야기다.
수면제를 품에 품고 사는 생활!
그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검시관이 그녀의 혈액을 분석해 보니,
그녀의 혈액 속에서 바르비탈(수면제의
일종, 상품명은 베로날)산염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채경림에게 뉴로시즈 증세라도 있었던
걸까.
그 사이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다, 죽고
싶다라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정신과 의사의 권고는 이혼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고 했다.
의사의 또 하나의 처방이 있었다.
그것은 연애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같았다.
내가 채경림을 다시 만난 것은 김포
국제공항 터미널에서였다.
그토록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었는데
다시 보게 되니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애당초 임자 있는 여자라는 생각에
체념하는 마음이 앞섰으나 그들 사이가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는 예측으로 해서
새삼스럽게 희망을 지니고 있는 터였다.
채경림은 여전히 색조가 강렬한 그
보라색의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자 스낵코너의
수툴에서 감전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채경림의 그 서슬 푸른 프로필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그이가 외국에 나가신다고 해서요."
채경림은 남의 말을 하듯 했다.
"윤형이?"
"네."
"어디로요?"
"미국에요."
그래, 누구나 미국행이군. 마치도 그곳이
한 번쯤 순례라도 해야 할 메카라도
되듯이. 그때 짐을 탁송하고 난 윤동진이
우리한테로 다가왔다. 여전히 다크 블루의
"윤형, 미국에 간다며? 오래 머물려나?"
내가 물었다.
"잠시 다녀 오려는 걸세. 바람이나
쐬려고....... 석 달 남짓 정도로 말야."
나는 금세 기대에 찬 흥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윤동진의 3개월간의 공백이 갑자기 그
어떤 의미를 띄우며 다가왔다.
"흐음, 그것 한번 부럽군."
"부럽긴......."
"그럼 잘 다녀오게."
나와 그는 손을 마주 잡았다.
"근데, 백형, 자네 혹시 일행이 있는지
모르겠군."
"아니, 난 혼잘세."
"그렇담 자네, 우리 집사람을 시내까지
윤동진한테서 이렇듯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속으로 뛸듯이 기뻐했다.
행운의 여신이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그들의 가벼운 포옹도 나는 그냥 웃어 줄
수가 있었다.
잠시 후, 나와 채경림은 주차장으로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마침내 나의 로얄 프린스에
채경림을 태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위해 도어를 열어 주는 나의 가슴은
설레임에 가득차 있었다.
채경림은 아무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앞좌석에 오르고 있었다.
이건 말하자면 첫걸음이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어프로치해야 하나?
머리 속을 휘젓기 시작한 나의 상념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채경림은 허물어질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액셀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채경림은 지체없이 안전벨트를 두르는
것이었다. 이런 습성을 지닌 사람은 아직
드물다. 외국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콘솔 박스의 시계 바늘은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은 이미 밤이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나트륨등의 불빛 속을 뚫고
한껏 액셀을 밟았다.
나는 두 사람만의 밤으로의 여로를
달리고 있다는 감상적인 낭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채경림은 공항을 멀리 벗어나 사직터널을
아니 시간의 지켜볼 뿐이었다.
"경림 씨, 어디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나는 중앙청 신호등 앞 정지선에서
브레이크를 밟으며 물었다.
채경림한테서 돌아온 대꾸는,
"아무 데나요."
였다.
아무 데나요라니....... 이토록 함축성이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경림 씨, 오늘 저녁에 무슨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운명의 계단을 향한 첫발을 내딛는
조심스러움으로 물었다.
"없어요. 집에 가서 주말 연속극이나 볼
일 말고는요."
"그럼 저한테 시간을 좀 내주시죠. 제가
채경림한테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그것은 이른바 묵시적인 승인이었다. 내가
이윽고 주차시킨 곳은 롯데호텔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나는 그녀를 프린스 유진으로 안내하려
했다. 우선 무드나 잡을 요량으로.
"저녁은 싫어요. 우리 술이나 해요."
채경림은 나의 낌새를 눈치 채고는
말했다. 그래서 우린 빌딩의 숲을 헤치며
술집을 찾아 순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바
윈저였다. 아니 그녀의 압구정동의 맨션
아파트의 홈 바였다.
집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일출봉의 유채꽃을 배경으로 한
것도 있었고, 사라봉의 저녁 놀을 배경으로
웃고 있었다. 모두가 달콤한 밀월(蜜月)의
시절을 되새기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나 보다.
그날 밤 채경림은 내 앞에서 치마를
벗었다. 그녀의 슈미즈 색깔은 검은
색깔이었다.
"아니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에요?
거기 좀 모자란 사람 아녜요?"
이렇게 우리 관계는 시작되었다.
채경림의 시신을 해부한 검시관은 그녀의
사망 시간을 위 속에 남은 생선의 소화
상태를 토대로 추정했었다.
"밤 9시를 중심으로 해서 한 시간 전후가
젊은 검시관이 제딴엔 장담하더라는
것이었다.
배 형사의 말로는 시신에 나타난
사반(死斑)으로 보나 경직상태로 보아
검시관의 장담에는 근거가 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나의 아파트에서 즐긴 채경림과의 최후의
만찬은 연어에 와인을 곁들인 것이었는데,
식탁에 촛불 하나라도 찾아 켜놓느라고
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윤동진은 누구보다도 먼저 강력계의
정중한 초대를 받았다.
강력계 형사들이 그가 키워 온 살의를
알고 있는 탓이었다.
내가 강력계에 달려가 아우성을 치지
않았어도 말이다.
어젯밤 9시 전후의 알리바이를요. 어디에
계셨지요?"
배 형사는 고양이와도 같은 나른한
어조로 묻는 것이었다. 매질하는 것보다는
애무하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한결 소름이
돋았다.
"그 시간엔 아마 무교동에 있었을
겁니다."
윤동진은 타들어가는 입술을 연상 축이고
있었다.
"무교동이라면 어디에요?"
"술집을 헤매었습니다."
"물론 입증할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9시 전후의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는 웨이터도 웨이트리스도 그리고
바 걸도 호스테스도 없었다. 그 어느
"그럼 '천국'에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살롱 '천국'에요."
그런데 그곳 여주인이 증언한 바로는
윤동진이 '천국'의 문을 노크한 것은 밤
9시께가 아니라 11시께라고 했다.
"윤 선생, 이걸 어쩌지요?"
윤동진으로서는 뭐라 대꾸할 길이 없는
듯했다. 그는 벼랑 위에 섰을 때만큼이나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 선생!"
배 형사의 입가에 여유있는 미소가
고였다. 그건 마치 채찍을 휘둘기 직전의
노예 상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윤 선생, 이젠 실토하셔야겠어요. 왜,
부인을 살해해야 했지요?"
"전 그런 일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겁니까?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누려는 게 아니에요."
"이것 보세요. 제가 제 알리바이를
제시하지 못했대서, 제가 반드시
범인이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이건
너무합니다."
"우리가 너무한다구요? 자기 아내의 목을
조른 사람이 너무한 거지요."
"아니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부인이 짐스러워지던가요?"
"......."
"모든 남편이 참는데 참으셔야지요."
"......."
"아니면 그 뭡니까, 돈 때문입니까? 모든
사람이 소원하는......."
"......."
압니다만......."
"무슨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오해?"
"네에."
"우리가 오해하기엔, 윤 선생, 선생의
수중에 돌아가는 돈이 너무 많아요. 어디
한두 푼이라야 말이지요. 이건 나더러
말하라면 인간의 탐욕이 몰고 온
범죄예요."
배 형사는 인정을 두지 않고 윤동진을
조이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교수대 위에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그가
결백하다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승부는 끝났어요."
배 형사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도대체 저한테서 뭘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건, 윤 선생, 진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려야 할 진실이 있다면 전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윤동진 씨!"
"마음대로 하세요. 법정에 세우고 싶으면
세우고, 교수대에 세우고 싶으면 세우고요.
전 이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윤동진은 그 후 시종 할 말이 없습니다로
일관했다. 이른바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좋아요. 정 그렇게 나오시면 고초를
겪습니다."
배 형사의 상투적인 위협을 담은 대사를
났다. 그러나 윤동진 앞에선 시간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법정에
서리라.
그런데 윤동지의 결백은 나만이 증명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채경림은 그날 밤 11시께까지는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느냐
마느냐가 문제였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아무도 그를 교수대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엔 입을 다물려고 했다. 살인마
비슷한 도착적인 심리에 사로잡히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성이 명하는 바에
털어놓았다.
"부인은 그날 밤 11시께까지는 살아
있었어요."
내가 불쑥 던진 말은 금세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배 형사는 한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말의 뜻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백 선생, 어떻게 그토록 자신있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부인이 살해되었다고 믿어지는 밤 9시껜
부인은 내 품에 있었어요. 내 아파트의 내
침실에서요."
나는 배 형사에게 채경림과의 찰나적인
대해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부인이 내 아파트를 떠난 것은 밤
11시께였어요. 우린 헤어지며 시계를
쳐다보곤 했습니다. 습관적으로요."
"흐음......."
"윤동진이 밤 11시께에 '천국'의 문을
노크했을 당시만 해도 부인은 살아
있었어요."
배 형사는 다시금 내 말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동진이 부인을 살해한다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얘기시군."
"그렇습니다. 그 친구가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이를테면 불가능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에."
"으음."
"젊은 검시관이 말예요, 부인의
사망시간을 잘못 추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추정이라는 것이 딱부러지게
몇 시입니다, 할 수는 없다고 들었지만요."
"그게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고,
기후나 환경에 따라 적지않은 변수가
있어요."
"그러니 부인은 밤 9시께가 아닌 밤
11시께에 살해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윤동진에게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는 그
시간에?"
"네."
배 형사는 처음엔 고개를 외로 꼬기만
했다. 윤동진을 범인이라며 길길이 뛰던
법도 했다. 더구나 모처럼 나꾸어챈 범인을
모질게 닥달하지도 못하고 풀어준다는 것이
싫었으리라.
"부인이 11시께 내 아파트를 나서는 것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아파트의
수위 아저씨예요. 부인은 언제나 주위의
눈길을 끌었어요."
"흐음."
"한번 알아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결국 윤동진은 나의 증언 덕분에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윤동진이
완전범죄를 달성했다는 생각에서 한시도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나는 그 후에도 외롭게 주장했었다.
"그 친군 살인자요. 법 앞에 서면
결백할는지 몰라도 하느님 앞세 서면
살인자요, 살인자!"
사건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윤동진은 적잖은 유산을 상속하게
되었고, 나는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을
잃게 되었다.
채경림이 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이그러진 윤동진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브르터스 너마저도!
하는 표정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채경림이 죽은 뒤의 평가는
사내들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나쁜
편이었다.
아름다운 악녀라고 했고 불륜의
악처라고도 했다.
윤동진이 채경림으로 해서 겪은 정신적인
질곡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비로소 그는 절망적인 생활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뭐래도 그 짧은 생애
동안 사랑과 예술에 열중했던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마음 설레어 본
여자도 다시는 없으리라는 안타까움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했었다.
차가운 지성적인 마스크를 지녔음에도
가슴은 열정으로 뜨거웠던 여자!
그런데 뜻밖에도 채경림의 숨결을 느끼게
"아무래도 '저 눈물의 날에'라는 제목이
감상적이잖아?"
나는 채경림에게 말했었다.
"그 제목엔 사연이 있어요."
채경림은 애매하게 웃음지었었다.
"무슨?"
"제가 서른 다섯에 죽은 모짜르트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찬란한 광휘로 막을 열고,
절망적인 가난 속에 생애를 마친
모짜르트를요."
"근데?"
"모짜르트는 레퀴엠을,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말예요, 그걸 작곡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채 어느 날 새벽에 죽었어요."
"흐음."
"근데 그의 자필은 '저 눈물의 날에'에서
"......."
"그때부터 '저 눈물의 날에'라는 말이
갑자기 나한테 강한 의미를 띠고 절박하게
다가서는 거 있지요."
"......."
"그래서 이 제목으로 한번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채경림도 그녀의 시를 미완으로
남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완성한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채경림뿐이라고 나의 이성은 시끄럽게
일깨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채경림은 지금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걸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얼마 안 가서
채경림을, 살아서 움직이는 채경림을 본
것이다.
그건 환각도 환시도 아니었다.
프라자 호텔의 광장에서 검은 색깔의
콩코드에 오르는 채경림의 모습을 똑똑히
본 것이다.
나는 한순간 넋을 놓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친 듯이 달려갔으나
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어김없는 채경림이었다.
내가 한시도 잊지 못했던 채경림의
오연한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은가.
그녀의 시신은 이미 3년 전에 그녀의
보라색의 이미지와 함께 어느 공원묘지의
기슭에 묻힌 처지다.
들고 간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런데 그녀가 무덤에서 기어 나왔다는
걸까?
공원묘지에서 아스팔트로!
무덤이라도 파보면 어떨까?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러웠고, 그녀의
죽은 얼굴을 살피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했더라도 그녀의
가족들이 보았을 것이 아닌가.
더구나 채경림의 시체 해부검안서도 있는
처지다.
사망 원인은 액사, 외경(外景)
소견으로는 연령 30세 가량의 건강한
체격의 여인. 체중은 48킬로에 신장은
수술의 흔적이 있으며, 경부(頸部)의
액흔을 제외하고는 다른 외상은 발견되지
않음. 음모의 발육 상태는 정상. 내무
소견으로는 뇌의 사이즈도 심장의 크기도
정상. 혈액 속에 바르비탈 산염을 함유.
자궁의 크기도 부피도 정상.
이것이 채경림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기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채경림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피카디리 극장 앞의 군중의 흐름
속에서다. 내가 차를 팽개치다시피 주차해
놓고 쫓아갔을 때는 그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나는 이젠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다이얼의 보턴을 눌렀다.
"윤형, 내가 자네 부인을 보았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제발 나의 착각이라고
하지는 말게. 벌써 두 번씩이나
보았으니까."
나는 윤동진에게 전화한 것이다.
"백형,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윤동진은 꽤나 허둥대는 것이었다. 아마
전화기 저편에서 엄청나게 실색하고
있으리라.
"윤형,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야
하지?"
"으음."
"아무래도 경찰에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닐까?"
"여보게 백형, 잠깐."
"뭔가?"
"자네, 나한테서 뭘 원하나?"
윤동진의 목소리가 칼자루를 빼앗긴 자의
"숨겨진 진상일세."
"으음."
"이건 어떻게 된 건가?"
"......."
그는 대꾸를 아니했다. 아니 못하고
있었다.
"난 우선 경림 씨부터 만나야겠네. 안
된다고는 말을 못할 걸세."
"백형."
"어떻게 하겠나?"
"알았네."
나는 이윽고 그의 체념의 소리를 들었다.
저녁 때, 내가 우리 아파트 단지의
공터에 마련된 놀이터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곳에 검은 세단이 길게 놓여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검은 콩코드였다. 그리고
그곳 빨간 벤치에 채경림이 있었다.
벌써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벅찬 기쁨으로 환성이라도 지를
지경이었다.
우린 이윽고 마주섰다.
"오랫만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오래간만이오."
나는 내 자신을 간신히 지탱하며 입을
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그녀는 여전히 신경질적이며 이기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좋아요."
나의 내부에서는 환희도 솟구쳤지만
증오도 솟구쳤다. 그녀를 와락 껴안고
싶기도 했고 후려갈기고도 싶었다.
윤동진이라는 사람의 아내도 아니구요."
그녀는 마치 신내린 무당처럼 주워
섬기는 것이었다.
"그럴 테지. 그 친구의 아내는 이미 무덤
속에 파묻혀 있으니까."
그리고 그 보라색도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지금 눈앞의 채경림은 검은 색조의
블라우스를 바탕으로 한 회색의
정장이었다.
"그래요, 그 여잔 그날 밤 9시께
죽었어요."
그러니 그 젊은 검시관의 추정은 한
가닥의 오류도 없었던 것이다.
"전 다만 그 여자의 대역(代役)을
치르었을 뿐이에요."
"흐흠, 대역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진짜 채경림은 눈앞의 채경림에
의해 살해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모든게 우연이 아니었군
그래."
"......."
"나를 유혹한 것도 계획적이었어. 그때
그 시상식에 나타난 것부터가......."
"......."
"무대 장치도 의상도 완벽했어. 그
연출이나 연기에 있어서도 하나에서 열까지
빈틈이 없었고 말씀야."
"......."
"그러니 나는 꼭두각시 놀음을 한
셈인가?"
"......."
"알리바이가 없었던 친구에게 단숨에
"우린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애달픔을 담고 말했다.
"그 여잔 지겨운 여자였어요."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 여잔 살 자격이 없었단 말예요!"
그녀는 외치듯이 말했다.
"흐음, 대단하군."
"......."
"그럼 당신이 채경림의 목을 졸랐소?"
"전 아니에요. 전 그 시간에 당신하고
있었잖아요."
"그래, 그런 당신은 누구요?"
"......."
"당신이 채경림이 아니라는 건 이젠
알았소."
"......."
"당신의 진짜 이름이 뭐냐 말이오?"
"윤신혜!"
"윤신혜?"
"그 몹쓸 여자한테서 오빠를 해방시켜야
했어요."
"세상에, 그럼 당신은......."
"......."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
잠시 우리 사이에 숨가쁜 침묵이 흘렀다.
"전 서울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녀가 침묵을 허물었다.
"당신이 그토록 빨리 제 시를
발견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
"더구나 제 모습이 눈에 띄리라고는요."
"......."
"하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
"제가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 서울에
돌아왔다면 믿어 주시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턱을 오연하게 쳐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 이제 절 어떻게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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