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미슐랭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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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의 비영어권 콘텐츠 순위에서 한국 콘텐츠가 1위와 톱텐 안에 드는 것은 이제 놀라울 일이 아닌데, <흑백 요리사>는 또 다른 티핑 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수치를 보면, 지난 9월 마지막주 시청수가 490만 뷰로 비영어 TV 콘테츠 1위를 기록했고, 영어 콘텐츠까지 합치면 TV 콘텐츠 중 4위를 기록했다. 사실 요리 경연대회는 한물 간 아이템이기도 하다. <아이언셰프>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요리 콘텐츠가 쏟아졌던 미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넷플릭스는 오히려 데이비드 장과 같은 셀럽 셰프를 내세운 라이브 쿠킹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흑백 요리사>가 그럼에도 잘 되는 이유는 일단 K푸드의 위세가 아주아주 크다는 이유가 있다. 직간접적으로 K푸드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얼마나 큰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자주 이야기 해왔고, 얼마 전에는 친구분의 포스팅에서도 다음 K푸드는 순대국이라는 말씀에 곱창/막창 BBQ가 되지 않을까 농담 섞어 이야기해왔는데,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한국 음식의 무한 진화를 보고 있으면 이게 농담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큰 인기를 얻는 흐름은 이미 늦어도 재작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23년에 특히 더욱 커졌고. 제작기획팀과 넷플릭스의 콘텐츠 기획자들은 이 흐름을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새롭지 않을 포맷을 있는 대로 스케일을 키우면서 화제성을 갖추게 만들었다. 미슐랭 쓰리 스타 셰프와 백종원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한국 (음식)의 대표적인 셰프들, 그리고 무려 아이언셰프에서 우승한 에드워드 리와 같은 요소까지 깨알처럼 챙겼다. 자, 보면 소셜미디어에서 온갖 이야기가 한국뿐만 아니라 한국 콘텐츠를 좋아하는 비영어권 국가들 그리고 심지어 미국 시장에 까지 퍼져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사실 넷플릭스는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가성비 콘텐츠'...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리터러시

[서평]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리터러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두 저자가 (문자 및 영상 텍스트를 다루는 능력인) 리터러시에 대해 대화한 기록을 남긴 책입니다. 저자의 주장을 소개하며 제 의견을 첨가하는 식으로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제 의견을 서술한 부분은 [대괄호]로 구분했습니다. ㅡ

Literacy 1 : 리터러시, 위기인가 변동인가

최근 초등학생들이 무언가 궁금할 때 찾는 매체가 뭘까? 어린 학생들은 (네이버나 구글이 아닌) 유튜브로 검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전통적 매체인 책은 물론) 네이버 등 검색엔진을 이용하는 것도 귀찮아한다고 한다. 네이버에 검색을 하면 어쨌든 '글'을 읽어야 하는데 유튜브에 검색을 하면 바로 '동영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은 시험공부를 할 때만 문자 텍스트를 참고하고 평소에 세상사가 궁금할 때는 동영상을 본다고 한다.

[ 저자는 1장에서 일단 문자에만 '텍스트'라는 명칭을 붙인다. 저자가 리터러시 개념을 문자 텍스트에만 적용하는 건 아니지만, 문자 외에는 '언어'나 '텍스트'라는 명칭을 붙이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생각을 형성하는 건 사실이지만 문자 텍스트에만 언어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영상에도 언어(의미)를 전달하는 체계가 있다. 우리가 워낙 어릴 때부터 티브이 등으로 영상을 많이 봤기에 영상 문법 체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예컨대 눈높이 아래에서 촬영된 피사체는 눈높이 위에서 촬영된 피사체보다 권위 있게 느껴진다. 우리는 평소 영상을 시청하며 이런 방식으로 지각하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의 틀을 만든다. (다만 영상은 휘발성이 강하다. 영상을 보고 난 후 글을 쓰거나 하는 식으로 내용을 구체화하지 않으면 영상 내용이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진다. 머릿속에 잡다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활자라는 틀로 고정시키면 영상 내용이 체계적으로 머릿속에 남는다.) ]

리터러시(literacy) 개념을 먼저 알아본 후 다시 논의를 전개하자. 우리는 리터러시(literacy)를 보통 "문해력'으로 이해한다. 문해력은 글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유네스코의 기준에 따르면) 리터러시는 다양한 맥락에서 '문자 자료'를 통해 정보를 검색하고 이해한 뒤 커뮤니케이션에 활용하는 능력이다. 정보를 얻는 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 리터러시를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이 질문을 던지며 논의를 전개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 이후, 사람들은 세계를 (자신이 해석하고 다루는) 텍스트로 여기기 시작했다. 독자는 읽는 행위를 통해 세상 만물에 의미를 부여했다. 독자가 저자만큼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독자가 주체(Subject)가 되고 (읽히는 대상인) 세계는 객체(Object)가 되었다. 독자가 세계를 움직이는 주체가 되면서 (신 중심 사회인) 중세에서 (인간 중심 사회인) 근대로 이행했다. 점점 (상대방 말에 응답하는) 2인칭은 희미해지고, (책을 읽으며 의미를 해석하는) 1인칭만 강조되기 시작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며 '말'이 '글'로 바뀌어 주체성(subjectivity)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글에서 영상으로 넘어가는 유튜브 시대에도 주체성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 영상 시대는 1895년대에 영화가 등장하면서 이미 개막한 게 아닐까? 물론 티브이나 영화관과 유튜브는 다르다. 유튜브는 AI(인공지능)가 알아서 내가 볼 영상을 정해준다. 관련 영상을 볼 때마다 점점 자극적인 영상이 추천 목록에 뜬다. 유튜브 유저는 재미있는 영상을 찾기 위해 의식적으로 검색어를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티브이나 유튜브나 영상을 재료로 만든 텍스트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둘 다 영상 문법 체계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텍스트다. ]

디지털 네이티브인 요즘 유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동영상을 접한다. 우리가 현재 사는 환경이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구성된 환경이기 때문에 동영상에 빠지는 일은 쉬운 일이다.

[ 정말 그런 것 같다. 유아를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유튜브를 틀어주면 너무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없는 요즘 맞벌이 부부에게 유튜브는 복음이나 다름없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문자를 읽기 전부터 유튜브를 시청하며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는 것 같다. ]

인터넷상에선 자기 방식대로 글을 읽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난독증이 있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요즘 노년층(60대 이상) 분들이 유튜브를 통해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태극기 부대 등)에 대해 한심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도대체 노인네들 왜 저러냐?"). 하지만 그건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행태다. 60대 이상 사람들은 (소통의 욕구를 표현할 창구가 없었다가 유튜브 등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일 수 있다.

저자는 최근 40대나 50대들이 (올드 미디어인 신문과 티브이에서 영 미디어인 스마트폰과 유튜브로 바로 넘어간) 60대 이상과, (태어나자마자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접하는) 10대를 모두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40대/50대는 올드 미디어와 영 미디어를 동시에 다뤄본 경험이 있으면서도 책도 읽었기 때문이란다. 저자는 60년대와 7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상대적으로) 책을 많이 읽어본 경험이 있기에 문화권력을 소유했다고 주장한다. 이 세대들 문해력 기준으로는 젊은 친구들도, 태극기 들고 나오는 노인들도 한심해 보이는 것이란다.

[ 나는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40/50대와 달리) 책을 안 읽는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먼저 건국 이래 책을 좋아하는 세대는 없었다는 언급을 해주는 게 공정하겠다. 현재 40/50대가 청년 시절에 유튜브나 인터넷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때는 동영상 매체가 티브이나 영화관 외에는 없었을 뿐이다. ]

의미는 사전에 주어지는 게 아니다. 독자가 맥락을 파악하며 맥락 안에서 의미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맥락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의미가 무엇이라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각자가 텍스트에 접근하는 맥락'은 서로 다를 수 있다. 누구도 모든 맥락에서 통하는 완벽한 문해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따라서 자신의 방식대로 텍스트를 읽어내지 않으면 리터러시(문해력)가 떨어진다고 비난하는 건 위험하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한테 리터러시(문해력) 자원이 많다는 것은 (타인을 깔볼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에 다리를 놓을 능력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책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며) 리터러시 개념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케이팝 스타의 유튜브 댓글이나 실시간 채팅창을 본 적이 있는가? 영어뿐 아니라 동남아 쪽 언어로도 댓글이 달린다. 한국 사람은 이런 댓글을 보며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이모티콘이나 느낌표 등을 보며 어떤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지는 대충 파악한다. 요새는 언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어떤 정서를 표현하는지, 다시 말해 어떤 정동(affection)이 느껴지는지 알고 공명(共鳴)하는 게 중요한 시대다. 정동은 파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요즘 10대나 20대는 '의미'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이모티콘/느낌표/좋아요/하트 등을 통해) '감정의 정도'를 공유하는 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유지하는 핵심은 '의미'가 아니라 감정의 강도다.

[ 동의한다. 실제로 유튜버나 아프리카 티브이 비제이들도 채팅창 댓글을 다 읽지는 못한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시청자들과 소통하는가? 비 오듯 쏟아지는 채팅창 댓글에 얼핏 보이는 하트 모양이나 그림, 단편적인 단어 등을 통해 시청자들이 공유하는 정서의 흐름을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 짐작은 대부분 맞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아프리카 비제이들은 이런 흐름을 '민심'이란 토속적 용어로 칭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예전 오프라인 시절에도 커뮤니티가 유지되는 동인(動因)은 '의미'보단 '감정의 공유'였던 것 같다. (사회 운동/소비자 운동 중심이었던) 과거 오프라인 커뮤니티도 감정의 공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니던가? 다만 유튜브 등에서는 비공식적 언어(이모티콘/느낌표/하트/좋아요)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해 외부에 의사(정동)를 전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저자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같은 의견을 지닌 사람끼리만 뭉치는 현상을 걱정한다. '차이'가 없이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기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이스북에 있는 "좋아요(like)" 버튼은 차이를 없앤다. 타인이 작성한 글에 대해 대체로 동감하더라도 세부적으로는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는데 ('좋아요' 버튼을 통해) 그런 차이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결국 의미는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말이다. 저자는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감정만 강화하는 상황을 걱정하며 <공감의 배신(2019)>이라는 책을 언급한다.

[ '좋아요'가 1이고 '좋아요를 누르지 않음'이 0이라면 1과 0 사이에 무수히 많은 입장이 존재한다는 뜻이겠다. 이렇게 디지털은 1과 0으로 모든 걸 표시한다. ]

Literacy 2 : 읽기는 여전히 유효한가

인쇄술의 발달로 구전되던 이야기를 책에 담을 수 있게 되자 독자가 책 속으로 들어가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제 이야기가 담긴 책을 통해 역지사지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독자는 책으로 이야기를 읽으며 (말을 듣거나 영상을 볼 때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야 한다. 맥락을 따라가는 가운데 유추하고 분석하며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맥락을 파악해 역사의 흐름 속에 사건을 배치할 수 있다면 역사적으로 사유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당대'인 3대(조부모/부모/나)를 넘어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려면 문자를 통한 기록이 필요하다. 도도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면, 자신이 거의 점처럼 느껴진다. 인간이 겸손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 하지만 영상을 보면서도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영화도 시종일관 흐름을 쫓아가는 가운데 (유추/분석하며) 관람해야 한다. 영화도 맥락을 따라가며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영상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이야기 흐름 속에 에피소드를 재배치한다. ]

(앞서 역사적 흐름과 맥락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텍스트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분류해보자. 첫째, 구술시대이다. 텍스트가 없던 선사 시대이다. 이 시기엔 지식이나 지혜가 부족장 등 공동체의 어른을 통해 전승되었다. 무언가 궁금할 때 문서를 찾는 대신 어르신을 찾아가던 시대였다.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가 중요했던 시기이다. 구술문화에서는 발화가 'and'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거 했고 또 이거 했고 또 이거 했어." 아이들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하곤 한다.

둘째, 텍스트가 등장한 후 보급되던 시대이다. 인쇄술의 발달로 경험이 문서화되어 인간의 외부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제 지식을 축적해 후손에게 전달할 매개가 생긴 것이다. 기억이 텍스트로 변환되며 지식의 양도 증가하게 된다. 문자문화에서는 'and'로 연결되는 문장보다는 '주절과 종속절이 결합된 문장'이 많아진다.

[ 문장을 정리해 말끔하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I think that 주어+동사+(목적어)"처럼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문장에 Before나 after 같은 접속사를 첨가해 시간적 순서를 표시하기도 한다. 성인은 "이거 했고 또 이거 했어."라는 식으로 절을 나열하는 대신 (절에 구를 삽입해) 말하는 경우가 많다. ]

셋째, 텍스트가 보편화되어 흔해진 현재 하이퍼텍스트 시대다. 현재는 (텍스트 숫자가 너무 많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지식을 만들어내는 게 어렵다. 이제 기존에 생산된 텍스트를 통합해 정리한 후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여 자신의 주장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참고문헌을 종합해 주석을 달고 새로운 주장을 만드는 식이다. 이제 권위 있는 저자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진리가 되는 시대가 지난 것이다. 경전이 사라지고 거대담론이 해체된 현재는 권위 있는 자료가 무엇인지 알아볼 안목이 중요해진다. 텍스트가 보급되던 시기에 인간의 경험이 문서화되며 역사가 쌓여갔다면, 지금은 역사가가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를 참고해 역사를 기술하는 시대다. 어떤 사료(텍스트)에 신빙성 있는 정보가 있는지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하겠다.

(과거 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말하는 구술과 반대로) 글은 현재 서술한 내용을 미래에 남기는 행위다. 미래의 누군가는 이 글을 해석해 자신의 의견을 만들 것이다. 이렇게 고독하게 자신만의 의견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근대적 시민(개인)이다. 독서라는 행위가 '개인'을 출현시킨 것이다. 구술문화에서 (2인칭으로) 상대방 말에 응답하며 공동체에 머물렀던 개인이, 근대 사회에서는 독서를 통해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독서를 하는 순간만큼은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지 않던가. 거리를 두고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자기를 대면해야 '내면'이 생긴다.

[ 저자는 독서를 해야 내면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나는 독서를 해야만 내면이 생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자가 생긴 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문자가 생기기 전인) 선사시대(Prehistoric Age)가 역사시대(historic Age)에 비해 훨씬 길다. 선사시대 사람들도 내면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

글은 영상에 비해 물리적 제약에서 자유롭다. 이유가 뭘까? 첫째, 문자 텍스트는 영상보다 유연하다. 작가는 머릿속에 있는 어떤 생각이라도 언어화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자 텍스트는 영상에 비해 생산단가가 낮다.

[ 동의한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 (신한 은행에 전산 오류를 발생시켜) 대한민국이 멸망하는 장면을 연출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CG 등으로 시각효과를 내야 하기에 돈도 든다. 하지만 작가는 앉은 자리에서 단 한 문장으로 저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이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 대한민국을 초토화시켰다." 이 문장에 부사와 형용사 등을 삽입해 특수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 소(대) 괄호나 인용부호를 사용해 점프 컷이나 플래시백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말이다. ]

(참고로 말하자면) 무언가를 쓰는 건 말을 그대로 옮겨놓는 행위가 아니다. 언어를 통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꺼내 시뮬레이션 하는 행위다. 작가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하소설이나 장편 드라마를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 언어를 활자로 만들어 종이에 인쇄하거나 컴퓨터에 저장한 결과물이 있기 때문에 스토리를 계속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무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로딩하고 편집해) 지식을 만들어 나눌 수 있다. 텍스트는 사유 자체의 길이를 길게 만들었다. 머릿속에서 생각만 할 때는 사유를 연속적으로 이어 붙이기가 힘들다. 텍스트들을 이어 붙이며 사고하며 인간은 체계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텍스트를 이어 붙이며 자신의 생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길이만 늘리는 게 아니라) 논리적 인과성이 맞게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둘째, 문자 텍스트 여러 개를 편집해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기가 (영상 매체를 편집하는 것에 비해) 편하다. (현재 영상 편집 기술로는) 여러 영상들을 하나의 영상으로 편집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쓰고 다듬는 속도로 영상을 생산하고 편집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멀었다. 저자는 요즘 세대가 (애초에 무언가를 읽어본 경험이 많지 않아) 무언가를 쓰는 걸 어렵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읽기가 기반이 되지 않으면 글을 쓰기가 어렵다. 인풋이 없었다면 아웃풋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 영상 편집 기술도 많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나는 영상 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유튜브에 올라오는 잘 편집된 영상을 보면, 영상 편집 기술도 보편화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글을 편집하는 게 영상 편집보다 쉽지만은 않다. 영상에서 편집에 비할 만한 작업이 글에서는 초고 스케치 후 계속 수정/퇴고하는 작업이다. ]

셋째, 문자는 추상적인 개념을 담기 용이한 매체다. 예컨대 <부재와 관계>라는 주제를 영상에 담으며 '부재(존재하지 않는 것)'와 '관계(대상과 대상이 맺어지는 방식)'라는 두 단어의 추상적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힘들다. (카메라가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기 때문에) 영상이 텍스트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잘 잡기는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신발 끈 묶는 법이나 레이업 슛하는 법 등은 말로 하는 것보다 영상으로 보는 게 훨씬 나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존재나 평등 같은 추상적 개념을 영상으로 정리해 시청자에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물론 유튜브에 등장하는 사람이 철학이나 과학 이론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이 준비한 스크립트를 그대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을 요약해 오디오북으로 만들어 시청자에게 들려주는 방식이다. 영상 매체의 특성을 활용한 경우라 보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영상이 현실을 재현(represent) 하는 미디어라면, 언어는 현실을 상징(symbolize) 하는 미디어다. 언어와 현실의 대상 간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언어는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묘사는 (종이 위가 아닌) 독자의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구현된다. 저자가 단어를 나열해 독자에게 어떤 개념을 전달하면, 독자는 기존의 자기 지식과 경험을 저자가 전달한 내용과 비교/종합한다. 문자를 통해 전달받은 정보에 자기 지식과 경험을 대입해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는 각각 다르다. 반대로 영상을 관람하는 시청자는 화면을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접한다. 물론 문자 텍스트뿐 아니라 웹툰이나 동영상을 보면서도 사유 역량을 키울 수 있지만, 문자 텍스트가 영상보다 독자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능력이 월등한 게 사실이다. 독자는 저자가 전달하는 내용을 (의식적으로 집중하며) 읽으려 노력하게 된다.

[ 카메라는 대상을 그대로 모사(模寫)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대상을 선택적으로 인지한다. (사람의 눈과 달리) 카메라 표준렌즈는 포커스가 한 곳에만 잡힌다. 물론 광각렌즈로 딥포커스 기술을 사용해 전체 프레임에 고르게 초점을 맞추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광각렌즈를 사용하면 화면상 공간이 실제보다 넓어 보인다. 반대로 망원렌즈(롱렌즈)를 사용하면 공간이 실제보다 좁아 보인다. 공간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상 연출가는 여러 렌즈로 화면을 왜곡해 다양한 영상미를 창조한다.

사실 동영상은 관객의 지각적 착각을 이용한 심리적 트릭이다. 우리 눈은 연속으로 나열한 사진들을 보며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움직인다고 착각한다. 초당 12프레임에서 24프레임으로 영사되는 이미지에 운동감이 더해져 잔상 효과(persistence of vision)가 발생하는 것이다. 영화는 스틸 사진 수만 장이 모인 필름 덩어리다. 이미지의 잔상 속에서 관객은 감동을 받고 생각을 환기한다.

(책을 통해 언어로 추상적인 개념을 생각하지 않고도)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영화에 나온 이미지를 상기하며 자유나 평등 등의 추상적 개념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나 시를 통해 추상적 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음악을 들으며, 행위예술을 하며, 혹은 영화를 보면서도 추상적 개념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지각적 착각이 사유를 만들어 낼 수 있기에 영화가 음악/무용/회화/문학/건축/조각에 이어 제7의 예술이 된 게 아닐까? ]

저자는 문자만이 최고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리터러시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각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잘 알기 위해 실제로 매체를 활용해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고 나서 글을 쓰거나 실제로 영상을 만들어보는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리터러시 능력은 계급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교과서/참고서/문제집 외에) 유익한 책을 읽힐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는 자녀 입시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것만도 벅차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문화적 자본이 풍부한 집 자녀들은 인터넷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유익한 영상을 시청할 가능성이 높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은 의미 없이 웹을 떠돌며 시간을 보내기 쉽다. 이렇게 리터러시 능력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현상을 소통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로 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이 유튜브를 보는 이유는 입시 공부에서 강조하는 획일적(교조적) 텍스트 해석을 넘어 다양한 영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는, 처음엔 요거만 봐야지 하고 시작하지만, 보다 보면 이것도 재미있네, 하는 식으로 계속 보게 된다.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이렇게 확장되는 것이다.

[ 저자는 유튜브 영상 알고리즘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유튜브가 시청자에게 맞춤 동영상을 추천하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독자들도 그렇게 관심 분야를 확장해가며 책을 읽었으면 좋겠단다. 하지만 (AI가 시청자가 좋아할 만한 영상을 계속 추천해주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좋은 면만 있는 것일까? 영상 추천 알고리즘에 길들여진 채로 유튜브를 시청하다 보면 점점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영상을 기대하게 된다. (교과서/참고서/문제집 위주로 한 가지 해석만 강요하는) 획일적 독서와 현재의 유튜브 영상 추천 알고리즘이 다른 것일까? 물론 저자가 유튜브를 찬양하는 건 아니다. 유튜브를 시청하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선의로(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적 비약을 감수한 것 같다. ]

리터러시 능력을 키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도서관, 서점, 평생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리터러시 능력을 키울 수 있고, 독자가 스스로 독서 모임을 만들 수도 있다. 한 사회가 이슈를 발굴해 공론장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가 리터러시의 척도이기에, 리터러시 능력 부족을 개인의 역량 문제로 돌리는 것은 위험하다. "노인네들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라"라는 식으로 혐오 발언을 쏟아내기보다, 사회적으로 리터러시 역량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 사실 여성 혐오든 노인 혐오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든 그 바탕에는 리터러시 문제가 깔려 있다. 노인들은 무식해서 선동에 넘어간다는 식으로 말해선 곤란하다. 유튜브 시대인 지금이 문자/영상 리터러시에 대해 논의할 적기다. 영상 리터러시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반에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Literacy 3 : 읽기에서 보기로, 미디어와 몸

같은 문학 텍스트를 읽더라도 종이책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와 모바일 기기로 읽을 때 눈과 손가락의 움직임이 다르다. 자주 사용하는 매체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눈과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차 바뀌게 된다. 결국 다른 매체의 사용이 다른 신체를 서서히 구축하는 것이다.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매체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시청하는 중에도 몸의 습속은 계속 변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긴 글을 지겨워하는 경향이 있다.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에 빠져들기 위해선 앞부분 5분의 1 정도는 지겹더라도 일단 읽어야 한다. 유튜브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처음 1~2분 동안 재미가 없으면 바로 다른 영상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이 습관이 책을 읽을 때도 이어지곤 한다. 글을 이해하고 생산하는 능력은 사회문화적인 훈련에 의해 발달하는 능력이라 진입장벽이 높다. 앞서 언급한 대하/장편소설뿐 아니라 시도 마찬가지다. 시는 (함축적인 표현 때문에) 해석이 난해하다. 반면에 동영상은 시각적 매체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워 어린아이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요즘 진리는 단순하다는 주장을 하며 복잡한 현상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을 경시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복잡하다. 복잡한 내용은 복잡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

최근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포털 뉴스나 위키백과, 블로그/카페 포스팅을 주로 참고한다. 내용을 다 읽지 않고 (눈을 빠르게 움직여) 원하는 정보만 스캔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한다. 그마저도 요즘은 유튜브 동영상 시청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구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유튜브 채널은 경쟁적으로 책이나 영화를 요약/편집한 후 영상으로 만들어 제공한다. 책이나 영화를 자기 주관대로 요약해 편집한 것이다(내가 작성하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책은 지면이 많기 때문에 (저자가 주관을 가지고 편집을 하더라도) 한 주제를 여러 측면에서 두루 조망하기 쉽다. 하지만 5분짜리 동영상을 만들 때는 사태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두루 담기 힘들다. 게다가 사람들은 동영상을 정성 들여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유튜브에 동영상은 널렸으니까). 그래서 요약 편집한 동영상으로 지식과 정보를 구하는 습관이 생기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점점 책이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 들여) 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몸이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매체가 사용자 몸과 습성(아비투스)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다.

그래도 학술 매체로서 문자 텍스트의 위상이 쉽게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식과 과학의 언어를 시각매체로 정교하게 전달하는 시기는 한참 나중이 될 것이다. 문자 텍스트는 해체/변형/재조립/재구조화에 적합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학술 문서 텍스트는 밑줄 그어지고, 요약되고, 재진술(paraphrase) 된다. 이게 차곡차곡 쌓여 새로운 텍스트가 하나 더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존 영상을 조합/편집해 새로운 영상을 만드는 건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유튜버가 다른 영상을 참조해 새로운 영상을 만들 때는, 다른 영상에 대한 해설을 (말이나 자막으로) 자신의 영상에 삽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말이나 자막으로 삽입하는 해설은 (영상의 영역이 아니라) 문자의 영역이다. 여러 영상을 모아 만든 영상이 부드럽게 이어지기는 힘들다.

[ 물론 영상을 이음매 없이 연결하는 기술이 등장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문자로 작성된 책을 읽을 거라 생각한다. (AI가 바둑으로 이세돌을 이겨도) 사람들은 여전히 바둑 대국을 관람한다. (축구하는 로봇이 메시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드리블을 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지금처럼 축구장에 가 메시가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선수의 능력만 보는 게 아니다. 성장 호르몬 결핍으로 매일 주사를 맞던 선수가 결국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우리는 스포츠 스타의 경기 내용뿐 아니라 개인적 스토리도 같이 소비한다. (십몇 년째 탄산음료/술/해로운 음식을 피할 정도로) 자기애가 강한 축구 선수 호날두의 이미지는 일반 대중에게 각인된 지 오래다.

소설가처럼 글을 쓰는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실제 사람이 쓰는) 소설을 구입하지 않을까? 대중은 소설 작가와 소설 작품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설가 공지영과 그녀의 작품 <즐거운 나의 집>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소설뿐 아니라 소설 작가도 스토리가 있다. 대중은 작가와 작가가 쓴 소설, 두 스토리 모두를 소비한다. Context(맥락)와 Text(저서)는 상호작용한다. ]

사실 '읽기와 보기'라는 행위 자체보다 '어디서 읽고 보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다운로드해 보는 건 다르다. 종이책으로 소설을 읽는 것과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는 것도 다르다. 내용이 같아도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가 다르면 독자(관객)가 콘텐츠를 인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래서 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별 매체의 성격을 따져보며 이 매체는 어떤 면에서 강점이 있고 어떤 면에서 약점이 있는지 명확히 알아봐야 한다.

[ 동의한다. 나도 LP로 음악을 들으며 매체가 음악을 듣는 태도를 바꾼다는 걸 실감했다. LP로 음악을 들으면 (스마트폰으로 들을 때보다) 집중해서 듣게 된다. LP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조정해 음악을 듣다 A 면이 끝나면 다시 B 면으로 넘겨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LP로 음악을 듣기 위해선 이렇게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음악을 유심히 듣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앤티크 소품으로 구입했던) LP 턴테이블로도 음악을 가끔 듣는다. ]

인터넷 세계에는 수많은 콘텐츠가 널렸다. 학문 텍스트 아카이빙에서 뉴스 기사와 블로그, 쇼셜미디어 포스팅에 이르기까지 읽을거리가 넘친다. 그래서 인터넷 유저들은 글을 자세히 읽지 않는다. 스크롤을 내리며(스와이핑을 하며) 흥미 있는 부분이나 필요한 부분만을 찾아 읽으려 한다. 글의 짜임새까지 신경 써서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인터넷에 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 말미에 간략한 요약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디시인사이드 등에서 유행했던 "3줄 요약"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요즘 '검색하면 되지 뭐 하러 책을 읽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기존 지식이 없으면 검색을 적절히 하기 힘들다. 모든 지식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컴퓨터와 달리) 지식을 검색할 때마다 하나씩 깨닫게 되지는 않는다. 지식 축적은 대부분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기존의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섞어 결합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지식을 소화한 후 내면화해야 실제 글을 읽거나 쓸 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보를 내면화하는 과정 없이는 지식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다. 앎(지식)이 삶(지식을 실제로 활용함)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지식도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식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자나 단어, 개념을 이해한 후 타자의 세계까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내가 사용하는 이 단어를 저 사람은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데, 한 단어가 서로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타자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인터넷상에서 기사나 댓글을 읽을 때 내 생각과 같은 것만 찾으려 하지 말고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미리 주체로 상정하고 세계를 객체로 이해하려 하면 배움이 없다. 기존 주체에서 벗어나 윤리적 주체가 되려 노력해야 한다. 내가 타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윤리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소설이나 영화, 혹은 시를 통해 (문학적 은유 등을 경험하며)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양하고 모순적인 상황에서 입체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간접적으로(문학적인 방식으로) 타인에게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주인공은 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리터러시는 이 질문에 답한다. 타인의 내면에 들어가 모순으로 점철된 다면적인 모습을 보다 보면 겸허해진다. 그 모습을 이해할 언어가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고) 신중한 결론을 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을 리터러시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 타인을 이해하려 하는 노력은 대부분 오해로 귀결되지만, 오해의 편린을 통해 상대와 교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오해'가 쌓이다 보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시점이 오지 않을까? 물론 상대방과 완전히 동일한 생각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

Literacy 4 : 리터러시,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교육 현장에서 리터러시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각 과목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치는 내용을 실제로 학생이 읽고 쓸 수 있으면 된다. 국어와 영어 수업 시간에 한국어/영어 문서나 영상을 이해하고 만드는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크게 보면 전문가를 배출하는 시스템도 리터러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법률 문서를 제대로 이해해 소장이나 판결문 등을 작성하고 작성한 법률 문서를 적절한 맥락에서 제시하는 능력 말이다.

리터러시라는 개념은 (텍스트의 수용/생산/활용뿐 아니라) '생산자와 수용자 간 관계에 대한 감각'까지 포괄한다. 관계는 실제로 상대방과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학생들은 단어와 개념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것 이외에 다른 역량을 키우기 벅찬 상황이다. 리터러시 교육과 현실 사회가 따로 노는 셈이다. 저자는 상기 리터러시 개념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수업 방식을 제안한다. 지역사회나 학교의 난제를 찾아 거기에 대해 공부하고, 사람을 찾아가고, 직접 글을 작성하는 식으로 수업을 운영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수업 방식은 공정성 시비가 생길 여지가 많다. 무엇을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해야 할지 애매하다. 학부모는 자식이 치르는 시험이 공정한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학생들이 치르는 내신이나 수능 시험은 객관식으로 구성된다. 결국 실제 수업은 선다형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시험이 대부분 객관식인 이유는 평가자인 교사의 공정성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모들도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공장소인 동네 도서관을 통해 리터러시 역량을 재고하는 게 바람직하다.

북미의 도서관에는 참고봉사 데스크(reference dest)라는 곳이 있다. 참고봉사 데스크는 (안내 데스크와는 별도로) 이용자들이 찾는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책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것을 넘어, 방문자가 가진 궁금증에 응하는 공간이다. "나는 언제나 천국을 일종의 도서관으로 상상해왔다(I have always imagined Paradise as a kind of library)."는 보르헤스의 말이 떠오른다.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할 수 있는 리터러시 교육 기법을 소개한다. 텍스트를 영상으로(혹은 영상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과정을 통해 미디어 간 차이점을 가르칠 수 있다. 지역 사회 이슈에 대해 직접 뉴스를 제작하게 하는 것도 좋다. 뉴스를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먼저 취재 대상을 정하고 (예산과 시간을 고려해) 취재 방향을 결정한 후 취재해야 한다. 취재한 내용을 어떻게 편집해 방송에 내보낼지도 결정해야 한다. 방송사는 여러 요소를 고려해 어떤 이슈는 배제하고 어떤 이슈는 취재한다. 학생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뉴스가 제한된 자원으로 만들어지는 매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절대적 중립성(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뉴스는 누군가가 의제와 취재 방식, 편집 방향 등을 정하는 과정을 거쳐 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직접 뉴스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언론에 대한 비판 능력까지 얻을 수 있다.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를 해서 그걸 기록으로 남기게 하는 방법도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이 왜 이런 용어를 사용해 대화를 하는지 이해하려 애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흔히 말귀라 부르는) '구술에 대한 리터러시 능력'이 생긴다. 말귀가 있어야 텍스트를 넘어 '그 텍스트를 말한 사람의 삶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게 돌봄의 핵심이다. 돌보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타자와 어울리고 공존하는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하다.

앎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존 지식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타인에게 전하는 상상력이다. 두 가지 앎은 함께 가야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는 역량을 가진 사람은 (맥락과 상대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구성할 줄 안다. 상대의 지식과 흥미, 집중력을 고려해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다. 과학적 개념을 사용해 픽션이나 내러티브 형식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삼아 만든 <컨텍트>라는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SF 작가는 과학적 지식과 내러티브를 상상의 세계로 통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과학적 지식을 서사를 통해 접한 학생들은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Literacy 5 : 삶을 위한 리터러시 교육을 향해

저자는 영어 작문 시간에 학생들에게 1999년 미국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두 작품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다큐멘터리 <볼링 포 컬럼바인>과 극영화 <엘리펀트>를 시청한 후 토론을 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감독과 극영화 감독이 같은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 이유가 무엇일까? 서로 다른 스타일의 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어필할까?

저자는 학생들이 영어 실력이 부족해 영어로 글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 못 쓰는 거라 단언한다.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검토하면 할 말이 생기고, 학생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진다. 삶에 깊이 들어갔을 때 할 말이 생기는 법이다. 저자는 요즘 학생들이 (글은 읽지 않고) 영상만 본다고 개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글과 영상을 연결해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디어 리터러시 수업에 참여한 학생이 수업 내용을 글로 정리하든 동영상으로 정리하든 상관 없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진행되는 리터러시 교육이란 이런 것이다. 홍천여고 학생들은 책을 읽은 후 찬반 토론을 하는 대신 직접 질문을 만든다. ('주제 통합 독서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한 편과 책 두 권을 함께 본 후에 질문을 만들어 토론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서술한) 문학과 (지식을 서술한) 비문학, 그리고 (이미지로 이야기와 개념을 보여주는) 영화. 이 세가지 리터러시를 종합한 것이다. 그다음에는 '인생 독서토론'이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진행한다. 학생 자신이 앞으로 살고 싶은 삶이 어떤 것인지를 중심 주제로 삼아 토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니들의 북토크'라는 제목으로 학생 5명과 교사 1명(혹은 독서토론을 성공적으로 했던 선배들)과의 독서토론 워크숍을 진행한다.

이런 독서토론이 (함께 책을 읽고 성장하며 학생간 관계에 다리를 놓는) 리터러시 교육이다. 독서토론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경험을 하고, 친구들이 내 이야기를 솔깃하게 들어줌으로써 인격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고, 학생들은 활기차게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학생 각자가 성장하며 동시에 학교를 활동적 삶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학생에게 억지로 독후감을 쓰게 하는 식으로 성과를 내게 하면 오히려 반감만 생긴다. 게다가 성과를 내야하는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책에 대해 시간을 들여 차분히 생각하기 힘들다. 홍천여고 사례를 담은 책 <독서동아리 100개면 학교가 바뀐다>를 참고하시라.

이처럼 사람은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삶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입시를 위해 독서를 할 때는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무언가를 읽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삶(생각)에 가 닿는 일이기 때문이다(반대로 무언가를 쓰는 행위는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던지는 일이다). 단어와 문법을 안다고 바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쓰는 행위는 그저 단어를 배열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쓰는 행위는 삶과 맞닿아 있기에, 삶이 빠진 글은 알맹이가 없는 글이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면 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교육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면 교육현장에 나가봐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진술하며 글을 쓰다보면 기존에 남이 쓴 글을 참고할 일이 생긴다. 그러다보면 특정한 장르의 텍스트가 왜 이런 구조로 만들어지는지 궁금해진다. 그렇게 (학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담론의 장에서) 논문을 작성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나 에세이 등도 마찬가지다. 기존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방법을 배운 후에 그걸 자기 삶의 영역으로 가지고 와서 변형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 장르 텍스트가 조직되는 방식을 알아야 기존의 틀을 변주할 수 있다. 이처럼 언어가 자기 삶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면 거기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삶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접한 후에는, 그 지식을 통해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려는 시도를 해야한다. 학생들은 (삶에 맞닿은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을 일곱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자.

첫 번째 키워드는 '조망'이다. 여러 미디어를 종합적으로 성찰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매체를 사용하며 일상을 영위하다 보면 그 매체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매체가 우리의 지각/인지/정서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매체를 사용할 때 초래되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일상'이다. 사실 리터러시가 가장 필요한 영역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이다. (거시적 미터러시뿐 아니라) '글로/말로 사과하는 법', '소셜미디어에서 답글 다는 법', '문자메시지/이메일 쓰는 법' 처럼 '작지만 중요한 일들'에 대한 미터러시 능력도 필요하다.

세 번째 키워드는 '반복'이다. 어떤 글이나 영상을 다시 보거나 읽으면 처음과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에 읽을 때는 저자를 따라가며 읽게 되지만, 다시 읽을 때는 자신을 생각하며 읽게 된다. 저자가 쓴 글이 독자에게 돌아오는 셈이다. 책이나 영상을 많이 읽기보다 반복해 읽을 필요가 있다.

네 번째 키워드는 '관계'다. (소셜 미디어 등에서) 자기가 할 말을 조리 있게 전하는 능력만큼이나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능력도 필요하다. 인터넷에서의 대화는 독백이 아니다. 대화를 지속하는 요령을 습득해야 한다.

다섯 번째 키워드는 '윤리'다.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도 윤리가 개입한다. 말은 사람/사회간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습득은 책임 있는 윤리적 주체의 성장과 떼어놓을 수 없다.

[ (예전에 인터넷 유저들이 많이 사용했던) '운지'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전에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

여섯 번째 키워드는 '교차'다. 리터러시는 사회적인 관계, 경제적 조건, 언어 능력 등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러터러시는 사회문화/경제/언어적 요인이 교차하는 곳에서 역동적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결혼이주여성의 건강 문해력을 알고 싶다면, (그녀의) 한국 체류 기간/출신 국가/연령/동거 가족의 수/학력수준/한국어 유창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마지막 키워드는 '호흡'이다. 장문의 글을 읽으며 복잡한 인간과 사회,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장문을 읽을 수 있으냐 없느냐는 (단순히 인내력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 문제다. (단기 이슈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가치 있는 정보를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서도 장문의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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