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리소설 악몽

  < 악몽 >

  은애는 당혹감을 느꼈다. 남편의 가방에

담긴 소지품들을 모두 꺼내자 밑바닥엔

의외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줄 끝에

조그만 방울이 달려 있는 가죽 채찍이었다.

못 볼 것을 보아 버린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며 그녀는 강한 의구심에 빠져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혼 여행의 가방 속에

왜 이런 것이 들어 있을까?

  신혼 첫날을 맞는 여자의 마음이란

비슷하다. 식을 끝내고 친지들의 전송을

받으며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남게 된다. 번거로운 절차로부터 벗어난

피로감과 함께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가슴이 부풀고 달콤한 기대에

젖어든다. 무엇보다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초야에의 흥분이 그러하다.

  은애 역시 다르지가 않았다. 김포공항의

트랩을 오르는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런 설레임 속에 옆

좌석의 그와는 별다른 대화도 나눠보지

못한 채 하늘을 날았고 제주도 공항에

도착하여 숙소까지 이르렀다. 신혼부부를

주요 고객으로 삼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그들은 비취빛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을 정했다.

  그가 이튿날의 관광 스케줄을 알아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간 사이 그녀는 자신의

가방 속에 담긴 것은 몇 개의 옷가지와

간단한 화장품들, 그리고 초야를 앞둔

신부가 알아두어야 할 사안들을

자질구레하게 열거한 어느 여성지의 부록

한 권.

  은애는 그 책들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내용을 모두 암송할 수

있을 정도까지되었다. ......첫날 밤

아무리 남편이 너그러운 이해심을 보이며

묻는다 해도 절대로 혼전 관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

것......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관계를

리드할 경우 자칫 남자는 불쾌해 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목욕은 남자가

하고 난 후 여자가 하는 것이

예의이다...... 첫날 밤 남자는 긴장

있다. 이럴 때는 조급히 관계를 요구하지

말고 함께 음악을 듣거나 와인을 마시면서

초야를 편안한 휴식 속에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두 시시콜콜 하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소용이 되는

조언들이었다.

  은애는 그 책을 읽으며 그곳에 적힌

사실들을 여러 모로 궁리했고 리허설에

임한 배우처럼 자신의 경우에 적용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곧 그러한

일체의 지식을 활용해야 할 시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은애가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일급

신랑감이었다. 대기업의 촉망받는 엘리트

사원이었고 훌륭한 가문의 자제였다.

훤칠하게 크고 이목구비는 수려하다.

과묵한 성품은 더욱이 남자의 매력을 한결

돋보이게 했다.

  그들은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할

번거로움마저 없었다. 시댁에서 그들을

위해 스물네 평의 아파트를 준비해 두었다.

다만 그는 서른네 살로서 그녀와는 9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이 약간의 흠이라면

흠이었다. 하지만 나이 차가 많은

남편일수록 아내를 아껴준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 또한 그런 대로

괜찮았다.

  어디 입맛에 꼭 맞는 혼처가 있겠니?

이것저것 따지다 후딱 서른 살이 넘게 되고

노처녀로 헐값에 팔려가기 십상이야.

서둘러 결정을 해. 이만한 상대 만나기도

후회하지 말고.

  처음 나이차가 마음에 걸려 망설이고

있을 때 중매를 알선한 고모가 다그쳤다.

그래서 결국 못 이기는 체 결정을 했고,

지금 이렇게 최고급 호텔의 전망 좋은 방

안에 앉아 있는 것이다.

  여장을 풀고 나자 무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여자의 마음이란 묘했다. 그의

가방을 본 순간 은애는 문득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여장 속에도 초야에 신랑이 취해야 할

충고를 적은 남성지의 부록이 들어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꾸밈없는 그녀의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것도 꺼내서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면 그가 자신의

세심한 배려를 흐뭇해 하리라고 생각했다.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손잡이에 열쇠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맨 위에는 간편한 평상복 한 벌과 한

번도 신지 않은 캐쥬얼 슈즈 한 켤레가

투명한 비닐에 포장되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자 면도기와 화장수, 그리고 남성용

로션 한 병이 나왔다. 은애는 그것들을

꺼내서 옷장과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시집도 한 권 있었다. 로트레아몽의

말도르노의 노래. 서른네 살의 증권회사

직원이 시집을 읽는다는 사실이 자못

기적처럼 여겨져 은애는 흐뭇했다.

  그리고 테이프가 한 개 들어 있었는데

표지가 없어 곡명은 알 수 없었다. 아마

놓은 것인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은애는

그가 무척 내면이 따뜻하고 낭만적인

사람일 거라는 추측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 밤을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지내려는 것일까? --은애는 그곳에 수록된

음악이 궁금했다. 쇼팽의 야상곡이나

화려한 폴로네이즈, 혹은 모짜르트의

교향곡 40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객실에 있는 전축에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가방에 담긴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꺼낸 뒤 마지막으로 잠옷을

꺼내는 순간, 무언가 둥글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순간이 지났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다만

가죽으로 만들어진 채찍이었다. 줄 끝엔

조그만 방울이 달려 있었다. 그 외에도

엷게 가죽을 꼬아 만든 기다란 끈을

타래처럼 감아 놓은 것이 있었다.

  신혼 여행의 가방 속에 왜 이런 것들이

들어 있을까?

  불현듯 당혹스러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못 볼 것을 보아 버린 듯 속이

메슥거리며 공연한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까지 꺼낸 것들을 다시 서둘러

가방 속에 쓸어 담은 뒤 뚜껑을 닫고

열쇠를 채웠다. 그리고 그녀는 창가로

다가갔다.

  커다란 전면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있었다.

  가슴이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기이한 공포가 엄습했다.

  언젠가 친구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중매로 결혼을 할 친구의 친척 언니

얘기였다. 그녀의 남편에게는 괴팍한

성벽이 있었는데, 그는 정상적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변태 성욕자였다는

것이다. 언제나 여자를 발가벗겨 놓고

폭행을 가해야만 기이한 성정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한다. 결국 여자는 고통에

시달리다 병든 몸으로 이혼을 해야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도 그런 사람일까?

  차가운 전율이 짜릿하게 등줄기를

핥았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러고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를 만난

것은 모두 해서 여섯 번뿐이었다. 처음

맞선을 보고 한 달 만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린 사이 고작 다섯 번의 데이트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창 유리에 이마를 댄 채 두려움을

가누려고 힘껏 주먹을 움켜 쥐었다. 그때

문득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은애는

흠칫 놀랐다. 가쁜 숨소리와 나직이

속삭이는 말소리.

  그제야 그녀는 테이프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미로운 쇼팽의 선율

대신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낯선 말소리가

들려왔다. 간드러지게 속삭이는 일본

남자의 말소리와 교차되며 야릇한 교성을

숨가쁘게 질러대는 여자의 숨소리.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엄청난 충격이 일시에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처하게 된 곤혹스럽고 끔찍한

현실에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선

자리에서 그대로 실신해 버릴 것 같아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마음만 조급할 뿐 어찌할 바를 몰라

돌처럼 굳어 있던 은애는 이윽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침대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들자 손가락이 떨렸다.

머리 속에는 무수한 숫자가 맴돌았지만

정작 자기 집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가슴을 조려댔다.

  다행이 숫자가 생각나 버튼을 눌렀을 때

통화가 더디었다. 몇 번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통화중의 신호음만이

곤경에 빠져 있는 것도 모르고 집에서는

태평스레 축하 전화를 받으며 웃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조급하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때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힐끗

돌아보았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그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다 그만 맥없이

수화기를 떨구었다.

  "왜 그러오?"

  그가 그녀를 껴안으며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그의 포옹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차마

용기가 안 났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다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으니...... 별 생각을 다

하는구만.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난

왕년에 전국 체전에도 출전했던 승마

선수였소.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 그런

말을 안 했던 것이 실수로군. 이건 승마용

채찍이오. 그리고 이건 말을 타는 데

필요한 고삐라는 거요. 알겠소? 난 이곳에

와서 당신과 함께 승마를 즐길

생각이었소."

  "그렇다면 그 테이프는...... 뭐지요?"

  "테이프에 대해선 내가 정중히 사과하오.

난 다만 친구가 좋은 음악을 녹음해

두었으니 신부와 함께 들어보라고 주기에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넣었던 것이오.......

짓궂은 녀석!"

  그의 답변은 어눌했지만 진심이

오해를 풀 수밖에 없었다. 점잖은 신사를

무턱대고 가학성 변태 성욕자로 오인해

버린 자신의 실수 또한 적지 않다.......

그러자 자신의 졸렬한 의심이 우스꽝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공상

때문에 황홀해야 할 신혼의 초저녁이

공포와 의심 속에 흘러가 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그날 밤 그의 품안은 따뜻했고 아늑했다.

그런데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그는

숫총각처럼 그 일에 서툴렀다.

  "오늘 밤은 이대로 자도록 합시다. 너무

피곤한 것 같으니."

  그는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은애는

아쉬웠다. 하지만 아까의 일도 있고 해서

남편의 의견을 거역하고 싶지는 않았다.

따랐고 피곤해서인지 깊은 잠속에 빠졌다.

  몇 시간인가 깊은 수면을 취했던 것

같았다. 귓전에서 무언가 희미한

신음소리를 듣고 그녀가 얼핏 잠에서

깨었을 땐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

커튼을 걷어낸 창 밖으로 희끄무레하게

침잠된 바다의 모습이 내보였다. 그런데

옆자리가 어쩐지 허전했다. 남편이 누워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는

의구심을 느끼며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무언가 그녀를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완강한 힘에 붙잡힌 듯 그녀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창을 통해 새어드는 뿌연

빛살을 받으며 침대의 발치 끝에 그가

끈끈한 음성과 여자의 교성이 어지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과

발목이 가느다란 가죽 끈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알았다.

  그가 침대를 돌아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손에는 기다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은애는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아까의 충격 때문에

자신이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