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리소설 변호사는 두 번 노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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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 < 변호사는 두 번 노크한다 >
지난 가을에 나는 낯선 두 사람의
느닷없는 방문을 받았었다.
한 사람은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쁜
소식을 전해 준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었다.
"심혁래(沈赫來) 씨, 당신은 오늘부터
억만장자요."
"......."
"근 5백 억 가량을 상속받게
되었으니까요. 아시겠소? 5백 억이에요,
5백 억!"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루 아침에 억만장자라니! 그것도 5백
억씩이나 상속받게 되다니! 이게 무슨 꿈
같은 소리인가.
오늘 같은 날에도 동화 같은 이야기가
존재하는 걸까. 나에게 이렇듯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이주일(李周逸)이라는 이름의 겉늙어
보이는 변호사였다. 고수머리가 얼마 남지
않은 대머리가 번득였고, 그 축 처진
입매에선 잔잔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인심좋은 시골 숙부 같은
느낌의 인물이었다.
"내가 심동성(沈東成) 씨의 고문
변호사라는 걸 알고 계셨던가? 혁래 씨
백부님의......."
어쨌거나 나로서는 너무나 상상을
뛰어넘은 소식이어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한순간 엉뚱하게도 지금의 느닷없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토록 나의 충격은 컸다.
"암튼 혁래 씨, 당신만이 유일한
상속자예요. 알고보니 당신 말고는 일가
혈족이 아무도 없어요. 직계 존비속도
형제자매도....... 그 양반 부인도
없으시더군. 돈은 많아도 박복한
사람입디다."
"네, 그렇긴 했습니다만......."
"혁래 씨, 누가 뭐래도 당신은 오늘부터
임페리알 호텔의 실질적인 주인이에요.
우리 나라 굴지의 호텔 업자의 후계자란
이주일 변호사는 그 자신에게 행운이
닥치기나 한 듯 기뻐했다. 그에게도 이런
벅찬 경험이 드문 듯했다.
"그런데 백부께서 저한테 유산을
남기도록 유언이라도 남기셨나요?"
나는 흐트러진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는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요?"
"법이 혁래 씨한테 유산이 돌아가도록
보장하고 있어요. 혈족이라고는 당신밖엔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나는 알지 못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나는 백부와 가깝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백부가 나를 어줍잖게 보는 눈이
국내에 진출한 것도 얼마 되지가 않았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젠 이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하루아침에 국내 굴지의
호텔 하나를 물려받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나는 어김없이 물려받았다.
그 후의 나의 꿈 같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시청 앞에 우뚝 자리잡은 그 웅장하고도
현란한 자태의 임페리알 호텔은 내가 꿈
속에서나 그릴 법한 나의 제국이었고
궁전이었다. 나의 식탁엔 어느새 철갑상어
캐비어에 훈제 연어와 구운 참새우가
올려졌고, 돈 페리뇽 샴페인이 곁들여졌다.
그리고 쇠고기 안심의 불란서 요리 샤토
브리앙이 메인 디시로 차려졌다. 나의
지갑에는 메트로폴리탄 클럽의 회원 카드를
나의 공식 자동차는 전용 운전기사가 딸린
싯가 1억 2천만 원의, 미국 사람들이 꿈
속에서나 그리는 GM의 캐디락이었다.
내가 직접 모는 개인용은 신흥 귀족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리고 싯가 1억 6천
5백만 원을 호가하는 서독의
BMW750il이었다. 색깔은 채코올그레이!
내가 간혹 오수를 즐기는 호텔의 스위트
룸은 하루 방 값이 250만 원.
1천만 원짜리 욕조에 순금 도금 세면대가
갖추어져 있으며 홈바가 있는가 하면
사우나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밤엔
허유정(許裕晶)이라는 이름의 나의
여비서와의 정사가 기다리고 있었고,
라이벌 호텔이라고 할 바이스로이 호텔의
아름다운 여주인 황신애(黃信愛)도 진하게
황신애는 한결 성숙했으며 농염했다.
"우리가 결합하면 신라호텔도 롯데호텔도
우릴 당해내지 못해요. 어때요, 우리가
결합하면?"
어느 날 나는 황신애의 프로포즈를
받기까지 했다. 나는 얼른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너무 당돌해서라고나 할까,
황홀해서라고나 할까.
"우린 두 사람 다 젊어요. 우리의 꿈과
정열을 합치면 못 이룰 것이 없어요."
"......."
"뭘 망설여요? 자, 어서 내 손을
잡아요."
"......."
가난한 학교 선생으로 고작 작가가 되는
것이 소망이었던 나에게는 꿈결 같은
나날이었다.
지난 가을에 나를 찾아온 두 번째 손님은
깡마른 몸매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중년
사나이였다. 하루 이틀 깎지 않은 수염이
앙상하게 돋아난,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지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심혁래 씨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나, 배철수(裵哲秀)라고 합니다.
배......철......수......."
그는 그의 이름 석 자를 꼭 기억해
주어야겠다는 자세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었다.
그림자를 감지했다. 아니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그의 직업을
경찰관이라고 밝혔으며 그것도 살인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형사라고 했다. 그는 잠시
그의 신분과 직함에 대한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새삼스러운
방문에 대한 나의 반응도 측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사슬이라도 끊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심혁래 씨! 당신을 당신 백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합니다!"
"아니, 뭐라구요?"
나는 기겁하며 뛰어올랐다.
"당신을 심동성 씨 살해 용의자로
체포한다고 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배철수라는
형사는 상투적인 어트로 예사스럽게 그의
직업적인 대사를 읊조렸으나 나한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아니라고는 말을 못할 게요. 자,
가십시다."
배 형사는 구속영장도 제시했고, 수갑도
내밀었다. 나는 내 앞에 닥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어설프게만 보이는 눈앞의 사나이가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인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냥 동네 야채장수 아저씨
같은 느낌의 인물이었다.
"아무리 돈에 환장했기로서니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요? 그것도 자기
큰아버지를요. 게다가 학교 선생이라는
그가 설교하듯 말했으나 열기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남의 운명이야 바람 앞의
등불이건 관심 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다만
이골이 난 대사를 되풀이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말짱하던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라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지. 어딘가
구리더라구. 그래서 시신을 재부검해
봤더니, 아, 글쎄, 독살되었지 뭔가.
그것도 죽음의 묘약이라고 하는 청산가리로
말야."
그렇다면 백부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 독살이라도
되었다는 걸까?
그런데 경찰은 나를 그 비정한
독살범으로 보는 것이다.
찾아냈어요."
"그럴 리가요."
"당신, 용케도 수사망을 벗어났다
싶었겠지. 하지만 그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린 부처님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보만 모여 있는 것도
아니니까."
배 형사의 상투적인 대사는 이어졌다.
그는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아마도 경찰에
투신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배 형사는 그
나름대로의 설법을 끝내자 나의 두 팔에
수갑을 채우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깔깔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그렇지, 나한테 엄청난 행운이
쉽사리 다가설 리가 있겠는가. 내가
뭔데....... 언제 소리 소문 없이 그리고
뒤탈 없이 행운이 다가서기나 했던가.
나는 소리없이 나 자신을 차갑게
비웃었다.
"뭘 꾸물대는 거요? 자, 어서 가요!"
평생을 이 일에 종사해서일까, 배
형사한테서는 인정의 부스러기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의 운명을 희롱하는
자세마저 엿보였다.
"좋아요. 가십시다."
나는 그 어떤 오해사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 오해도 얼마 안 가서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백부를 살해한
기억도 없거니와 도시 그런 일이 없어서다.
어렵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풀려나기는
커녕 자칫 잘못하면 교수대에로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난 결백하단 말입니다. 결백해. 내가
무엇 때문에 큰 아버님을 살해한단
말입니까. 혈족은 나 하나뿐인데 고이
기다리고 있으면 유산이 고스란히 돌아올
텐데 무엇 때문에 그래요. 무엇 때문에?"
나의 항변의 제스처도, 그리고 항변의
대사도 무릇 형사피의자에게서 으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배 형사로서는 익숙한
듯했다. 그런 탓일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천만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요.
백부께서 그 뭐예요. 조만간 새장가를
드시려 했어요. 젊고 아름다운
여류 화가를 아시던가?"
"모릅니다."
"하긴 모른다고 해야겠지."
"그래서요?"
"그래서 당신이 재빨리 손을 썼다는
얘기요. 당신, 끝내 아니라고는 못할
게요."
"나는 아니에요. 나는......."
나는 마냥 발버둥쳤지만, 어떻게 하랴.
내가 유일한 상속인인 것을. 나한테만
결정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다.
"자, 어서 실토해요. 승부는 끝났어요."
배 형사는 하루 아침에 억만장자가 된
사나이를 그의 레벨로 끌어내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소주잔이나 기울이며
니나노타령에나 흥취를 돋우는 그의
그런데 백부가 그의 빌라에서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나눈 만찬의 술잔에 나의 지문이
뚜렷이 찍혀 있다고 했다.
"난 초대받은 일도 없고 저녁을 나눈
일도 없어요. 술을 나눈 일은 더더욱
없구요. 요근래에 대면한 일도
없다니까요."
"흐흥, 그래요오."
"누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독약을 탄
술잔에 지문을 남겨놓고 그냥 돌아온다는
겁니까?"
"흐음."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가 그토록
어리숙해 보입니까?"
"그럼 누가 당신 비에서 당신 지문이
묻은 술잔을 훔쳐내어 당신 백부의
해서 당신한테 혐의를 씌우려 했다는 게요,
뭐요?"
"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 그자를
찾아내야 해요."
"누가, 무엇 때문에, 무슨 이득이 있다는
게요?"
"나는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나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기만 했다.
"이봐요, 심혁래 씨!"
배 형사는 나한테 담배를 건네며 달래듯
말했다.
그는 나를 조이기도 했고 늦추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뭐래요. 당신이 결백하다면
그날 밤의 알리바이를 제시하라고 하지
않았소. 9월 4일, 일요일 밤의
"누가 초대권을 보내 주어 발레 구경을
갔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발레
구경을요."
"글쎄, 그걸 입증하라고 하지 않아요."
"그 방법이 없다니까요."
나는 누구한테선가 그 구하기 어렵다는
볼쇼이 발레단의 초대권 한 장을 받았었다.
명색이 그래도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인지라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세종문화회관으로
달려갔었다. 더구나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
하는 공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 혼자 갔었소?"
"네."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하구요?"
"물론입니다."
"그래, 어땠어요? 발레가......."
"그야 대단했습니다. 처음부터 관객을
완전히 압도했으니까요. 숨을 죽이고
쳐다보고 있었어요. 세계 최고의 발레라는
말에 하나도 손색이 없더군요."
"흐음."
"무엇보다도 생 상스의 음악 백조를
배경으로 한 작품 빈사의 백조에서 보인
니나 세미조로바의 춤엔 관중 모두가 흠뻑
매혹되었습니다."
"신문에도 그런 평들이 났더구먼. 환상의
신기니 뭐니 하며......."
"신문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 그곳에서 누구 아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었소?"
세계적인 발레야 어떻건 배 형사의
관심은 나의 알리바이였고 나의 목을
"만나질 못했습니다."
"한 사람두요?"
"네, 한 사람두요."
"나 참, 이것 보라지."
"재수가 없으려니......."
"근데 누가 초대권을 보내 주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요?"
"모릅니다."
"당신 덮어놓고 모릅니다군."
"어느 고마운 학부형이라도 보내 준 줄
알았습니다. 간혹 있는 일이라서요."
"혹시 그 초대권을 갖고 있진 않아요?
당신이 갖고 있어야 할 반쪽 말이오."
"글쎄, 그 반쪽도 잃어 버렸다니까요."
"그걸 잃어 버려요?"
배 형사는 내 말을 도시 못미더워하는
잃어 버렸습니다, 하니 말이다.
"누가 훔쳐 갔던가."
"훔쳐 가다니, 그걸 누가 훔쳐 가요?
어디다 쓰게......."
"으음."
그 반쪽의 찢겨진 초대권만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나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반쪽이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나에겐
불운의 연속이었다.
"심혁래 씨! 이제 공연한 연극은 관두고
실토하시지. 이렇게 피곤하게 일을 치를 건
또 뭐요......."
"잠깐만요."
나는 퍼뜩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생각이 납니다만, KBS인지 MBC인지
잘 모르지만, 그날 밤 방송국 기자가
비디오 카메라를 둘러메고는 돌아다닌 걸
본 일이 있습니다. 근데......."
"근데?"
"휴식 시간에 로비에서 관객의 모습을
이모저모로 담고 있더군요."
"당신의 얼굴이 비쳤을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요?"
"요행인지는 몰라도 저한테 앵글을
맞추고 한참 돌렸어요. 그 어색했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흐음."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9월 4일 일요일 밤에 말이지요?"
"네에."
알아봐서......."
"그게 사실이라면요?"
"당신은 자유를 얻게 될 거요."
나는 마침내 도저히 빠져나올 것 같지
않은 어둡고 절망적인 미로의 끝에서
아리아도네의 실뭉치라도 찾은 느낌이었다.
미로의 입구를 안내해 주는 그 실뭉치
말이다.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영문인 걸까.
방송국에서는, KBS건, MBC건,
세종문화회관에 카메라를 들쳐메고 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진 촬영이나 화환
증정은 공연 분위기를 해친다고 해서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로비에서 찍는 걸 봤습니다.
뉴스용인가 보던데, 카메라에 분명히
"......."
"카메라맨도 기억이 납니다. 장발에다가
검은테 안경을 낀 친구였어요. 네,
그래요......."
"......."
그러나 몇 번 확인해도 방송국에서는
우린 그런 일이 없다는 한결같은 대꾸였다.
그리고 요즘 장발이 어디 있느냐는 핀잔도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짓이었을까?
나한테 초대권을 보내준 사람은 또
누구일까?
나를 불러낸 다음 백부를 살해한 사람은
또 누구일까?
"이건 음모예요, 음모!"
나는 그 어떤 음모에, 그것도 매우
걸려들었음을 직감했으나 그 음모를 밝힐
방법이 없었다.
나의 조바심에는 아랑곳없이 세월은
흘렀고 법적 절차도 진행되었다.
나는 마침내 법정에 서게 되었고,
1심에서도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우리 집에서 청산가리도 발견되고 백부
집에서는 내 지문이 묻은 청산가리를 탄
글라스도 발견되고 보니 옴쭉달싹 못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큰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대법원에서의 최종 심리가 남아
있었으나 법률심인 대법원에서 나의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보냈다.
5백 억의 유산 상속! 그리고
교수대에로의 길! 생각만 해도 기가 차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주일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와는 두번째 만남이었다. 그는
여전히 대머리를 빛내고 있었고, 실눈도
깜박이고 있었다.
"나 원 이런 변이 있나! 혁래 씨가
이렇게 고초를 겪다니!"
"이 변호사님!"
"내가 그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어요.
그래서 혁래 씨가 이 고생을 하는 걸
몰랐어요. 하지만 이젠 염려를 놓으세요.
내가 있으니까요. 내가 누굽니까."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주일 변호사가
법정투쟁에도 남다른 이력이 있지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탐정 능력도 남다르다고
했다. 명탐정 페리 메이슨 변호사만큼이나
재기와 뚝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탓일까, 그가 재판에서 지는 일이란
여간해서 없다고 했다.
"혁래 씨, 내가 당신의 그날 밤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의 알리바이를 이제 와서 입증할 수
있다니...... 이건 또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 깨끗하게 포기했던,
그래서 삶에 대한 희망도 지워버렸던
현장부재증명이 아니던가.
"아니 어떻게요?"
나는 가슴이 설레이는 것을 달래면서
물었다.
돌린 사람을 찾아냈어요. 내가 이래뵈도
유능한 조수를 여러 사람 거느리고
있어요."
"오, 이럴 수가!"
그렇다면 나는 살 길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절망의 어둠 속에서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벅찬
기쁨이 여울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러니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거요."
이 변호사가 지난번엔 기쁜 소식을 전해
주더니 이번엔 큰 곤경에서 구해주려 하고
있다. 그는 마치 알라딘의 램프의
마법사와도 같았다. 아니 영락없이 한국판
페리 메이슨 변호사인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 카메라에 담긴 비디오
했어요. 그걸로 혁래 씨의 무죄가 증명될
수만 있다면요."
"으음."
"그날 밤의 혁래 씨의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다는군. 오늘 아침에도 재생해서
살펴봤다고 해요."
"그 사람, 뭣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얼마간 숨을 돌리며 물었다.
"그 뭐요, 사진작가라고 자처합니다만,
지금은 충무로에서 무슨 스튜디오인가를
차리고 결혼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어주고
있다고 하더군. 이름이
서세필(徐世弼)이라던가...... 그날 밤
제딴엔 볼쇼이 발레단의 춤추는 모습을
담고 싶어 그곳에 갔었나 봐요. 방송국을
가장해서......."
"그런데 혁래 씨, 그 사람이 비디오
테이프를 그냥 넘겨 줄 수는 없다고 해요.
자기도 장사꾼이라면서......."
"그야 값을 치러야지요."
"아암, 그래야지요. 그런데......."
이 변호사가 잠시 망설임을 보였다.
그것은 어딘가 계산된 망설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꿍꿍이 속셈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데요?"
"턱도 없이 비싼 값을 부르고 있어요."
"이쪽의 급한 사정을 아나 보군요.
그렇지요?"
"그래요."
"할 수 없지요. 그래 얼마나
요구하던가요?"
달라지 뭐예요."
"2프로라면?"
"10억이지요."
"10억이라니요? 비디오 필름 한 통에
10억이란 말입니까? 아니, 단 몇 컷의 필름
값이 말예요."
"그래요."
"세상에!"
아무려나 이건 너무하다.
돈 만 원이면 사는 비디오 테이프를
10억을 내라고 하다니!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가 교수대에 서게
될는지도 모르는 극한적인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혁래 씨, 비디오 테이프 하나 값이
10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혁래 씨의
이 변호사의 말이 백 번 옳았으나 쉽사리
수긍이 되지 않았고 마음도 내키지 않았다.
"싫으신가?"
이 변호사가 미묘하게 변하는 나의
신색을 살피며 물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이 변호사님, 그
친구도 싫다고 하겠지요?"
"그야 그럴 테지."
"으음."
"나도 혁래 씨한테 강요할 수는 없군.
돈이 어디 한두 푼이라야 말이지."
"......."
"혁래 씨, 내가 얘기해 드리는 걸 깜빡
잊었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내일 모레면
이민을 떠난다는군. 여길 모두
청산해서......."
"한번 잘 생각해야 할 거요."
"......."
나는 서세필이란 그 정체 모를 사나이가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살려면 10억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만한 돈은 이젠 나에게
새발의 피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목숨을 잃게
된다. 물론 임페리알도 잃는다. 허유정도
잃고 황신애도 잃는다.
"좋습니다. 이 변호사님.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그 친구의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가 살자면 말이오."
"그렇군요."
친구가 쥐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나는 무사히 배철수
형사의 손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아니
교수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는 증거로서도 완벽했다.
그 테이프는 내 얼굴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 그곳에 갔었던
이덕하(李德河) 씨의 얼굴도,
조윤필(趙潤弼) 씨의 얼굴도 담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우상이라고 할 그 두 사람은
고맙게도 그 사실을 기꺼이 증언해 주기도
했다.
나는 마침내 석방되었다.
그리고 석방과 동시에 임페리알 호텔의
주인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그 대가로
10억을 지출하기는 했다.
캐디락에서 내리는 나를 허유정이 뛰쳐와
반겼고 황신애도 달려와 반겼다. 특히
황신애가 나를 위해 그녀의 호텔 볼룸에서
성대한 파티를 베풀어 주었다.
"혁래 씨, 우리 건배해요."
"......."
"자, 그 어두운 그림자일랑 훨훨 떨쳐
버려요."
"......."
"이제부터 우리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둘만의......."
"......."
사나워져 있기만 했던 나의 심기는 한결
풀렸다.
이주일 변호사도 우리의 파티에 참석해
주었다.
"혁래 씨, 아무튼 잘 됐어요. 좀 고생은
하셨지만......."
"......."
"호사다마라고 하지 않소. 액땜 한 셈
치시오."
"......."
이 변호사는 여러 모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는 이렇듯 결말이 난 것도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어떻게 되었건
임페리알을 소유하지 않았느냐고도 했다.
"이 변호사님!"
"왜 그러시오. 혁래 씨......."
있습니다."
"뭔데요?"
"누가 우리 백부님을 살해한 걸까요?"
"흐음."
"그리고 누가 나한테 그 초대권을 보내
주었을까요?"
"으음."
"그리고 말씀예요, 그 서세필이란 자가
그날 밤 그곳에 나타나 나한테 카메라의
앵글을 맞춘 것이 한낱 우연이었을까요?"
"우연이 아니에요."
"그럼?"
"그날 밤 혁래 씨가 그곳에 나타나리라는
걸 그 사람은 잘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초대권을 보내준 친구가 바로 그
"네에?"
"혁래 씬 아직도 이 사건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시는군."
"그럼 백부를 살해한 것도 그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소."
"아니, 무엇 때문에?"
"10억을 벌기 위해서요."
"설마......."
"이건 말하자면 혁래 씨, 일종의
신종기업(新種企業)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신종기업! 아시겠소?"
"맙소사!"
"그 친구가 새로운 건수를 하나
개척했다면서 나더러도 한몫 끼라고
하더군. 이번엔 한 30억은 받아낼 수가
"이 변호사님!"
"말해 보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변호사와 그 서세필이라는
사내하고는 어떤 관계입니까?"
"어떤 관계라니?"
"혹시 그 친구가 이 변호사님의 조수는
아닙니까? 유능한 수하가 많다고
하셨는데......."
"흐음."
"아니면 이 변호사님 자신이 서세필은
아닙니까?"
나는 한순간 이 변호사의 대머리에 검은
가발을 씌워 보았다. 그리고 검은테 안경도
끼워 보았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본 듯한
모습이 되어 다가왔다.
"허허, 이 사람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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