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리소설 회전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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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전목마 >
그를 죽이고 싶다고, 강렬한 살의를 느낀
것은 장마가 막 시작되던 날이었다.
비수처럼 가슴 속에 들어와 박히는 살의를
쓸어 내리면서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까지 나왔다.
분노의 눈물인지 원통해서 흘리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손 끝 발 끝까지
바들바들 떨리면서 이가 앙다물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민혜는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의 일이었다.
마치 누에가 실을 뽑듯이 살인 스케줄이
술술 생각나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미 벌써부터 구상해 놓은 것처럼 그
스케줄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넌더리를 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내가 이상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육개월 전 노기호와의 불륜의 관계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녀는 심한 전화
노이로제에 시달려 왔다. 기호가 전화를
통해 수시로 협박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주 무자비한 사내로 이쪽의 사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육체와 돈을
벨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기호가 또 전화를 걸어온 게 아닐까 하고.
한참 전화 벨이 울리고 난 뒤에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녀가
우려했던 대로 상대는 노기호였다.
"비가 오니까 그게 생각나지 않아.
그래서 전화를 걸었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호텔방에 애인하고 틀어박혀서
재미나 보는 게 제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흐흐......."
느릿한 말솜씨와 그 뒤에 이어지는
흐릿한 웃음소리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언제쯤 저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일주일 전 완전히 헤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이백만 원을 요구했고, 그래서 그녀는 그
말을 믿고 그에게 그 돈을 주었다. 그런데
걸어 추근대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그는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번번이 깬다.
"전화 끊으세요."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 보고 싶어서 전화 걸었는데 왜
이래."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핏기 없는 입술을 떨며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약속 좋아하네. 오 여사가
왜 이러실까. 용돈 좀 줘놓고 그걸로
입막음할 셈이야. 나를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하지 말라구. 생각해서 전화 걸어
그는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적은 스물
아홉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남자랍시고
그녀에게 반말로 지껄이고 있었고, 그녀는
여자랍시고 그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라면 약속을 지키세요. 전화
끊으세요."
"못 끊겠어. 내가 자진해서 끊기 전에는
전화 끊지 마. 만일 전화 끊으면 집으로
바로 찾아갈 거야. 이봐 오 여사, 이렇게
비도 오는데 그렇게 빼지 말고 나오라고.
나 생각나지 않어? 난 말이야, 오 여사
생각나서 죽겠어. 지난 일주일 동안
참느라고 혼났단 말이야. 내가 오 여사를
너무 사랑하는가 봐."
"듣기 싫어요."
수화기를 움켜쥐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 여자가 왜 소리 지르고 야단이야.
이봐, 일주일 동안 못 만나니까 어디가
근질근질하나 보지. 나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바로 집 앞에 있다구. 길 건너에
있는 다방에서 전화 거는 거야. 오아시스
다방 말이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나와."
민혜는 기가 막혔다.
"나갈 수 없어요! 안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잔말 말고 나와. 만일 안 나오면 집으로
쳐들어갈 거야. 알아서 해."
남자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민혜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얼빠진
상대방은 야비하고 무자비한 남자이다.
만일 나가지 않으면 틀림없이 집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도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놈은 가끔씩
그렇게 충격요법을 씀으로 해서 더 많은
돈을 울궈내려고 든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빼앗긴 돈이
이천만 원이 넘었다. 그 돈은 지금 모두
빚으로 남아 있다. 급한 대로 여기저기에서
꾸어다 그의 입을 틀어막다 보니 어느새
이천만 원이 넘었다. 그리고 매달 원금은
커녕 이자 갚기만도 벅차서 쩔쩔매고 있다.
그래서 무슨 수를 내긴 내야겠다고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김열모는
고지식하고 꼼꼼한 남자였다. 어느
일백오십만 원 가까운 월급을 집으로
가져오는데, 그 중 생활비로 오십만 원만
아니에게 떼어 주고 나머지는 무조건
은행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 오십만 원으로 그녀는 네 식구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고 두 아이의
교육비에도 충당해야 했다. 그러니 여유는
거의 없이 빠듯하게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노기호를 알기 전에는 그
돈으로 그런 대로나마 알뜰하게 가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것이 노기호와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돈이 생길 데라고는
생활비에서 떼어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 밥상이 형편없어지고 아이들
간식이며 옷가지 하나 변변히 사먹일 수도
모르고 그녀의 고지식한 남편은 아내가
너무 알뜰하게 생활하다 보니 먹는 것 입는
것에 그렇게 궁기가 도는 줄로만 알고
군소리 하나 하지 않았다.
민혜는 기호라는 연하의 제비족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육개월 동안 단 하루도
번민과 후회로 고통을 겪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에게 매달여 사정하고 저주하고
후회해 봤지만 그는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뼈마디가 저리게 후회하곤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노기호는 냉혈한이었고
끊임없이 돈과 육체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에게 협박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시달리다 보니 그녀는 하루게
증세까지 보이기도 했다.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화장을
하면서, 그녀는 그 아름답던 얼굴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보기 싫게 변해 버릴
수 있을까 하고 내심 적잖게 놀랐다. 그와
함께 이제 사태는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빨아마셨다. 이제 나에게는 빨릴 피가
없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뒤는 절벽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치러야 할 역할이다. 나 혼자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든지 아니면 논개처럼
그를 껴안고 뛰어내리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나를 너무 괴롭혔다. 숨을
쉴 수 있는 구멍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아이들은 방학을 맞아 외가에 가고
없었다. 남편은 지금쯤 회사일에 정신이
팔려 있을 것이다. 그녀는 며칠 전 남편이
그녀의 생일 선물로 사준 은목걸이 시게를
목에 걸고 아파트를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을 원망해 보았다. 남편이 외국에만
가지 않았어도 기호와의 정사 같은 것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가
정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비족과 몸을
섞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난히 성적인 욕망이
강하고 그것을 제어할 힘이 없는 삼십대의
난숙한 아내를 일 년이나 넘게 혼자 내버려
것이다.
해외 연수를 목적으로 열모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작년 1월이었다. 그리고
십사개월 만인 지난 3월에 귀국했던
것인데, 그 이전에 그러니까 그가 돌아오기
한 달 전인 2월에 민혜는 이미 기호의
노리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람난 유부녀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민혜 역시 춤바람이 나서 정신없이 홀과
홀을 돌아다니다가 기호를 만났던 것이고,
그의 유혹에 쉽게 몸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바람을 피우기 위해서
가정부까지 한 명 구해다 놓고 싸돌아
다녔던 것이다.
일단 그녀의 몸을 정복한 기호는 바람난
유부녀의 최대 약점인 남편에게 불륜관계를
그녀로부터 거액의 돈을 착취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가
요구하는 대로 빚을 얻어댔던 것이다.
기호는 정말로 길 건너편에 있는 다방에
앉아 있었다. 아직 낮 열두 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는 긴 다리를 꼰 채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어쩌자는 거예요?"
그녀는 앉자마자 따지듯 물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차나 한 잔 마시지 그래."
그는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미남이었다.
그 얼굴을 여자 낚는 데 이용하고 있으니
한심한 청년이었다. 이제 그 얼굴은 미남이
아니고 역겨운 얼굴일 뿐이었다.
"이 여자가 왜 이러지. 비싼 밥먹고,
인상 쓰지 말고 얼굴 좀 피라구. 예쁜
얼굴을 왜 우거지처럼 구겨."
"그렇게 약속해 놓고 왜 또 전화하는
거예요?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그만큼
사람 피를 말렸으면 됐지 또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 거예요."
"시끄러!"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구두 끝으로 그녀의 발등을 밟았다.
"보고 싶어서 왔는데 정말 이러기야?
약속 좋아하지 마. 난 계속 전화를 걸 거고
너를 만날 거야. 알았어? 나를 피하려고
하지 마.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
달라붙는 성질이니까. 거머리처럼 말이야."
민혜는 발등이 아파 얼굴을 찡그렸다.
걸려 있는 은목걸이 시계를 잡았다.
"이거 근사한데 그래, 어디 좀 풀어봐."
"손 대지 마세요."
그녀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앞으로 잡아당겼다.
"좀 보자구."
그대로 뒀다가는 줄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그것을 목에서
빼냈다.
"근사한데 그래. 일제군. 못 보던 건데
어디서 났지?"
기호는 그것을 손가락에 걸더니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민혜는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생일 선물이에요."
주신 거군. 잘 됐는데."
그는 그것을 사파리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일어서더니 건들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민혜는 카운터로 가서 차값을
치르고 그 뒤를 따라나갔다.
그는 이미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3층은 여관이었다.
그녀는 증오에 차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올라가다 말고 멈춰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목걸이 시계를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올라와, 빼지 말고 올라와."
"싫어요."
"안 올라오면 가서 끌어올 테야.
창피당하기 전에 빨리 올라와."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큰일이라는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방 안은 무더웠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그들은 서둘러 관계를 치렀다. 거부한다고
해서 관계를 피할 구 있는 게 아니었다.
기계적으로 옷을 벗고 침대 위에 올라가
동물처럼 그의 요구에 응하면서, 그녀는
쾌감과 증오를 동시에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 어린 애무니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오직 기게적인 배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났을 때는
수치심과 환멸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반면 남자는 야욕을 실컷 채우고 난 뒤의
포만감에 젖어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운 채
담배연기를 기분좋게 뿜어대고 있었다.
"집에 돈이 얼마나 있어? 몇 억쯤 되나?"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옷을
"남편이 없으면 그 돈을 독차지하겠군.
오 여사, 내 쭉 생각해 봤는데 나하고
결혼하는 게 어때? 어딜 봐도 지금의
남편보다는 내가 나를 거야. 젊겠다,
장래성이 있겠다...... 그리고 힘
좋겠다...... 이만하면 됐지 않아. 그
나이에 어딜 가도 나만큼 젊은 남자
얻어걸리기 힘들 거야."
"흥, 그럴 테죠."
하고 그녀는 코웃음 쳤다.
그러자 기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농담이 아니야. 우리 결혼하자구. 결혼
못할 게 뭐가 있어. 하면 하는 거지. 안
그래."
그녀는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기만
같지가 않았다.
"남편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이혼하면
되지 않아. 그까짓 거...... 이혼해 버려.
여자 하나 만족 못 시키는 남자를
남편이랍시고 섬기고 살 필요가 어딨어.
당장 이혼해 버려."
그는 기세등등해서 소리쳤다.
남편에게서 그녀가 만족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남편과 이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결혼생활의 모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혼이 그렇게 쉬운지 아세요. 이혼은
커녕...... 만일 우리 관계를 알게 되면
우리를 죽이려 들 거예요. 우리 아빠는
평소에는 색시처럼 얌전하지만 한번 화가
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틀림없이 당신을 죽일 거예요."
"그렇다면 좋아. 내가 먼저 선수를 치지
뭐. 내가 먼저 그치를 없애 버리면 될 거
아니야."
그는 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술 더 뜬다더니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는 감쪽같이 처치할 수 있어.
완전범죄란 없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어때? 내가
먼저 당신 남편을 없애 버릴까? 그러고
나서 우리 결혼할까?"
절망적인 기분이 그녀로 하여금 극단적인
농담에 응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그의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빼내 입술 사이에 꽂고 성냥불을
있었다.
"없앨 수 있으면 없애 보세요."
그녀는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후우
하고 내뿜었다.
"정말이야?"
그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약속하는 거다. 해치우고
나서 나하고 결혼하는 거야?"
"고려해 보죠."
"고려해 본다고? 좋았어."
그는 손바닥을 딱 마주치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 흡사 어린 애처럼 두
발로 침대를 찼다. 그러다가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착수금을 좀 줘야겠어. 맨입으로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돈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녀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착수금도 안 주고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하란 말이야. 오백만 원만 가져와. 오백만
원만......."
"미쳤어요. 돈 이야기는 이제 하지
마세요. 그만큼 빨아먹었으면 됐잖아요."
"착수금만 주면 죽여 주겠단 말이야."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세요. 하지만
돈은 없어요. 앞으로 한푼도 줄 수 없어요.
그리고...... 아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마세요."
그녀는 기호의 아기를 배고 있었다.
것이다. 그가 악랄하게 임신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내 자식인데 왜 미련을 갖지 말라는
거야?"
그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민혜는 내친김에 말해 버리기로 했다.
"아기는 이 세상에 없어요. 저주스런
씨를 낳아서 어쩌자는 거예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에 가서 수술해 버렸어요."
"뭐가 어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발길이
날아왔다. 그녀는 침대 아래로
나동그라졌다. 기호는 발과 주먹을
동원해서 그녀를 무자비하게 차고 때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생각했다. 그는 방바닥에 그녀를 눕혀놓은
채 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나중에는
머리채를 휘어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했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그렇게 실컷
때린 다음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 내로 오백만 원을 마련해 놔.
아기를 죽인 대가 치고는 싸다는 걸 알아야
해. 만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넌
끝장이야. 넌 다시 남편을 볼 수 없게 돼."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의 끝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키려고 바둥거렸다. 문득
아득한 혼미 속에서도 남편이 생일 선물로
준 목걸이 시계가 생각났다. 기호가
가버리기 전에 그것을 놓고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웬지 입이 움직여지지가
그녀가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것은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그녀는 자신의 끔찍한
모습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은 그렇다치고 코피가 터져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인 데다 오른쪽
눈두덩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부어오른 것은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씻으면서 노기호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이 죽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으로 바뀌더니 마침내 죽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사고로 발전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얼굴에 난 상처에 대해
남편에게 해명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그녀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다가 노상에서
강도의 습격을 받아 돈을 빼앗기지
당했다고 꽤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열모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돈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그녀의 어리석음에 대해 호되게 꾸짖었다.
그까짓 몇 푼 안 되는 돈, 강도가 요구하면
줄 것이지 그걸 안 주겠다고 움켜쥐고
강도한테 죽도록 얻어터지다니 그야말로
천하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여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민혜는 경찰에 신고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남편은 그것만은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을 그녀는 살인
준비로 보냈다. 그것은 운명을 건
도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패란 곧 죽음이었기
죽이더라도 그녀 자신만은 살아남아 다시
행복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장마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노기호의 전화를 받고 외출하던 그날도
역시 비가 내렸다.
그녀의 남편은 갑자기 몸살감기 같은
증세로 그 전날 저녁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이튿날 아침이 되자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포기한 채 자리에 누워
버렸다.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그는
몸살감기가 분명한데 병원에 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하면서 약국에서 약만
사다가 복용하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한 남편을 혼자 놔두고
외출한다는 것이 어쩐지 꺼림칙했다.
친구 딸의 결혼식에도 가보아야 하고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도
들러야 한다는 둥 그럴 듯한 핑계를
댔는데, 그녀의 남편은 자기 걱정은 하지
말고 나갔다 오라고 그녀를 내쫓다시피
했다.
약속 시간보다 사십 분 가량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녀는 즉시 준비에
착수했다.
기호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특급호텔인
H호텔 커피숍이었다. 장소를 그곳으로 정한
것은 그녀 쪽이었다.
그 호텔 방에는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각종 음료가 들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제일 높은 층에 방을
넣었다. 물론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도
가짜로 적었다.
이윽고 25층 9호실에 들어간 그녀는
큼직한 여행용 숄더백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불그죽죽한 액체가
가득 담긴 흰 플라스틱통과 강력 접착용
테이프는 침대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
다음에는 냉장고 속에서 맥주병을 모두
꺼냈다. 하이네켄 맥주 네 병 외에 소형
양주병과 청량음료가 있었다. 맥주와
캔사이다만을 남겨두고 모두 침대 밑으로
밀어넣었다. 맥주 마개를 따고 투명한
액체를 몇 방울씩 병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것은 강력 마취약이었다.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그런 것을 준비하는 데 큰
마취약을 탄 다음 도로 마개를 닫고
그것들을 냉장고 속에 넣어두었다. 준비는
끝났다. 그녀는 방을 나와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은 오후 한 시
정각이었다.
웬일인지 기호는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한 시 삼십 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백만 원의 거금을 챙기도록 되어 있는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마침내 두 시가
되었다. 그녀가 그만 일어설까 말까
망설이는데 그의 모습이 입구 쪽에서
보였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손을 쳐들어
보였다.
"그냥 나가요. 위에 방을 얻어놨어요."
그들은 커피숍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고 안색이 웬지
창백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오백만 원 가져왔어요."
그녀는 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다섯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것을 집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민혜는 그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옷 벗을 필요 없어."
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상하군요. 오늘이
거예요."
기호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의 옷 벗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옷을 완전히 벗고 난 그녀는 알몸으로
냉장고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에서
캔사이다를 꺼냈다.
"사이다 마실래요? 맥주도
있는데......."
그가 맥주를 몹시 좋아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맥주 한 잔 줘."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맥주병 마개를 딴 다음 맥주를 한
잔 가득 따라부었다.
기호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민혜는
비우고 나더니 갑자기 옷을 벗고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매우 거칠게 위에서 헐떡이고
있는 동안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할 일을 끝내고
난 기호는 그녀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이내 의식을 잃었다. 마취의 긴
잠 속으로 떨어진 것이다.
민혜는 서둘렀다. 옷을 입고 나서 자신에
관계된 것들을 먼저 챙겼다. 침대 밑에서
테이프와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테이프로
남자의 손발을 칭칭 감았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까지 봉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그의 몸뚱이에다 플라스틱 통 속에 있는
붉은 액체를 쏟아부었다. 휘발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 줄도 모른 채 기호는 잠
출입문 쪽으로 가져가면서 길게
흘려놓았다.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통로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한 뼘쯤
간격을 남겨두고 문을 닫았다.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에 종이가
부착되어 있었다. 불을 켜자 종이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불이
확 하고 이는 것이 보였다. 문을 쾅 닫고
돌아섰다. 호텔을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와 호텔 밖으로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달리면서 호텔을
돌아보았다. 25층의 방 하나가 시커먼
연기와 화염에 싸여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낯선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중년의 뚱뚱한 남자 한
명이 그녀에게 안주인이 되느냐고 물은
다음 신분증을 꺼내 보였는데 형사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부군께서는
계단에까지 나와 숨져 있었습니다. 가슴에
칼을 맞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손 안에
이런 게 들어 있었습니다. 이거 혹시 부인
거 아닙니까?"
형사는 그녀의 눈앞에 은목걸이 시계를
흔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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